최악의 피싱 조직 '민준파'는 어떻게 108억원을 뜯었나

최악의 피싱 조직 '민준파'는 어떻게 108억원을 뜯었나

입력
2023.11.11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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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장기형 보이스피싱의 이면]
서민들 다급한 마음 이용해 대출미끼 범행
저녁 외출금지+여권 반납... 조직 엄격관리
법원, 총책에 징역 35년, 부총책 27년 선고

지난해 10월 인천공항을 통해 민준파 총책 최씨와 부총책 이씨가 국내로 강제 송환되고 있다. 경찰청 제공

지난해 10월 인천공항을 통해 민준파 총책 최씨와 부총책 이씨가 국내로 강제 송환되고 있다. 경찰청 제공


너, 나랑 같이 일 한 번 해보자.

영화 '신세계'에서 강형철(최민식 분)과 이자성(이정재 분)의 첫 대화를 연상시키는 '은밀한 모의'는 2015년 6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시작됐다. 마닐라의 이 작당이 '신세계'(언더커버)와 달랐던 것은 바로 악독한 범죄 모의(보이스피싱)였다는 점이다. 전화금융사기로 돈을 벌기로 마음 먹은 A씨는 마닐라 카페에서 최민준(가명·37)을 만나, 그럴싸한 범죄 계획을 알리며 '팀장으로 일해 달라'는 제안을 했다.

마닐라에서 시작된 은밀한 모의

이들이 계획한 것은 '기업형 보이스피싱 범죄'였다. 마닐라 콘도 등에 사무실과 숙소를 마련한 뒤, 개인적인 인적 관계를 이용하거나 필리핀 현지 사이트에 “상담원을 구한다”는 내용의 광고를 게시하며 신규조직원들을 모집했다.

이들이 범행 초기에 가장 신경 쓴 것은 보안 유지. 조직원들은 실명을 쓰지 않았다. '승이' '맹구' 등 가명 또는 별명을 써서 신분을 철저히 위장했는데, 훗날 이 조직(민준파)의 총책이 되는 팀장 최민준이 '민준'이란 가명을 쓴 것도 이 때부터다.

이들은 조직원들의 여권을 거둬 여행사에 맡겨버리는 방식으로, 조직원의 이탈을 적극 방지했다. 한 번 가입한 조직원은 마음대로 탈퇴할 수 없었고, 내부 사정을 밖에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수시로 교육받았다. 만일 단속이 시작되면 절대 윗선을 불지말고 뒤처리를 할 수 있게 관리자급 조직원에게 알리도록 지시받기도 했다.

나중에 민준파 부총책에까지 오르는 이정우(가명·31)가 보이스피싱에 발을 들인 것도 이 무렵이다. 2016년 1월 이정우는 큰 돈을 벌고자 필리핀으로 갔다. 그렇게 이 조직에 들어와 '이정우' '최용환' 등의 가명으로 상담원 일을 시작하게 됐다. 그렇게 이들은 보이스피싱 피해자들로부터 돈을 뜯어내기 시작했고, 최민준과 이정우는 팀장과 팀원으로 2017년 1월까지 58억원에 가까운 돈을 챙겼다.

계속될 것 같던 범죄행각은 곧 브레이크가 걸렸다. 2017년 6월 조직 총책 A씨가 수사기관에 검거됐다. 그러나 최민준과 이정우는 범행을 그만두는 대신 새 조직을 꾸리기로 했다. 같은해 가을쯤 금융기관을 사칭해 저금리 대출을 미끼로 하는 보이스피싱 범행조직을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탄생한 조직이 바로, 피해자들로부터 총 108억 원이라는 거액을 뜯어낸 악명 높은 보이스피싱 조직 민준파다. 김민준이 자기 가명을 내세운 범죄조직이다.

'외부교류 차단'... 철저한 조직 보안 시스템

보이스피싱 조직 '민준파' 조직도. 서울동부지검 제공

보이스피싱 조직 '민준파' 조직도. 서울동부지검 제공

새 조직 우두머리가 된 최민준은 마닐라 등에 사무실을 마련한 뒤 모집책을 통해 조직원을 모으기 시작했다. 모집책들은 인터넷 광고를 보고 연락을 준 이들에게 “필리핀에서 일을 하면 고수익이 보장된다”고 꼬셔 조직원을 끌어모았다. 이들은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던 보이스피싱 조직원들을 포섭하기도 했다.

총책 최민준과 부총책 이정우는 △콜센터 직원 △출집(보이스피싱 인출책) △장집(대포 체크카드 모집책) △국내인출책 △국내환전책 등으로 구성된 조직을 꾸렸다. 콜센터 조직은 팀장급 별명이나 팀 구성원들의 특성에 따라 '영팀' '올드팀' '미드팀' 등으로 불리는 10여 개팀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다단계 사기 조직과 유사한 방식으로 실적을 독려하는 동시, 팀간 경쟁을 부추겼다.

두목 최민준은 이전 조직에서 배운 노하우를 아낌 없이 써먹었다. 특히 보안 유지에 더욱 만전을 기했다. 각 팀장들은 조직원들에게 숙소 및 콜센터 사무실에서의 규칙 등을 교육시키고, 가명을 사용해 서로의 본명을 알지 못하게 했다. 또 사진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지 못하게 하는 등 조직의 정보가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게 단속했다.

이런 규율을 정하는 동시에 감시도 철저하게 했다. 범행 시 사용하는 노트북을 사무실 밖으로 가지고 나가지 못하게 했으며, 노트북을 이용해 개인 ID로 접속하거나 USB를 사용하는 것 또한 막았다. 또 업무 중 식사나 흡연 등의 사유로 외부출입을 하지 못하도록 했고, 식사는 인근 한인식당에서 배달 시켜서 먹게했다. 업무시간 이후에도 조직원들끼리의 단체활동을 제한하는 등 외부와의 교류를 차단했다.

이 조직은 ‘총책-부총책-팀장-팀원’ 등 4단계로 이뤄졌는데, 팀원보다 팀장에게 더 많은 돈을 지급했다. 직접 피해자와 통화해 사기를 시작하는 1차 상담원은 범죄 수익의 15%를, 그 위 팀장급은 22~24%의 수익을 지급받았다. 최민준은 전체 범죄 수익의 50%가량을 챙겼다. 부총책 이정우는 수익의 7~9%를 분배받았다.

징역 35년...보이스피싱 범죄 역대 최고형

2017년 처음 조직을 만든 최민준은 2021년까지 약 4년 간 보이스피싱 범죄를 일삼으며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했다. 경기남부경찰청은 2020년 2월 ‘민준파’의 존재를 인지한 후 2017년도부터 2020년까지의 3년간 발생 사건을 분석했다. 경찰은 조직원들을 특정해 범죄단체조직죄, 사기 등의 혐의로 국내 조직원들을 순차적으로 검거했다.

경찰은 이후 총책 최민준 등 조직 윗선까지 검거하기 위해 약 2년 간 장기 추적을 거듭했다. 총책의 동선을 확보한 경찰은 현지 사법기관과 공조하며 1주일간 잠복한 끝에 지난해 9월 드디어 최민준을 검거했다. 나흘 뒤에는 총책의 검거 사실을 눈치채고 급하게 다른 곳으로 도피를 준비하던 부총책 이정우와 조직원 4명도 모두 검거했다. 이들은 같은해 10월 수원지검으로 구속송치됐다.

지난해 7월 출범한 보이스피싱 범죄 정부합동수사단. 최주연 기자

지난해 7월 출범한 보이스피싱 범죄 정부합동수사단. 최주연 기자

검찰은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해 보이스피싱범죄 정부합동수사단(합수단)으로 사건을 이송, 집중적으로 보완수사를 실시했다. 검찰 공소사실에 따르면 최민준과 이정우는 2017년 12월쯤부터 약 4년간 피해자 560명에게 적게는 200만 원부터 많게는 3억3,000만 원까지 뜯어 총 108억 원을 가로챘다. '민준파' 이전 보이스피싱 조직에서 얻은 범죄수익을 합하면 피해액은 총 160억~170억 원으로 늘어난다.

합수단은 민준파 일당들이 대출이 절실하거나 기존 대출의 금리를 낮춰보려는 서민들의 심리를 이용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봤다. 실제로 피해자들은 대부분 소액대출이 필요한 자영업자, 프리랜서 등 경제적 약자층으로 조사됐다.

합수단은 법리 검토를 통해 단순 사기죄에서 법정형이 높은 특경법 위반으로 혐의를 변경하며 법원에 중형 선고를 요청했고, 최민준에겐 동종범죄 역대 최장기형인 징역 35년과 추징금 20억원이 선고됐다. 이정우에겐 징역 27년과 추징금 3억원이 선고됐다. 기존 보이스피싱 총책에 대한 최장기형은 징역 20년(안산지원·피해액 54억원)이었다.

재판부는 "저금리 대환대출을 미끼삼는 보이스피싱 범죄의 경우, 서민층 피해자는 기존 대출채무도 변제되지 않은 채로 신규 대출금까지 갚아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게 된다"며 민준파 조직원들을 꾸짖었다. 이어 "피고인들이 일부 피해자와 합의했으나, 이는 피해자들이 편취금의 10~15%에 불과한 합의금이라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곤궁한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라며 엄중한 처벌을 내린 이유를 밝혔다. 검찰과 피고인 측은 모두 1심 판결에 항소했다.


오세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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