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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적으로 말해' 팔찌 교환... 한국에도 상륙한 이 '女가수' 나비효과

입력
2023.11.08 04:30
수정
2023.11.08 09:5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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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들썩인 테일러 스위프트 '디 에라스 투어' 실황 국내 상영
"스위프트 성장 보며 나도 용기"... "내한공연 성사 안 돼 영화라도"
"크루얼 서머~" 노래 따라 부르고 손 흔들기도
관객 과반이 1020... 거대 연예 산업 횡포, 여성 혐오 홀로 맞서는 데 열광

3일 서울 용산구 CGV극장에서 10, 20대 여성들이 팔찌를 서로 교환한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모두 테일러 스위프트(사진 아래) 팬이다.

3일 서울 용산구 CGV극장에서 10, 20대 여성들이 팔찌를 서로 교환한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모두 테일러 스위프트(사진 아래) 팬이다.

"저... 팔찌 바꾸실래요?"

지난 3일 오후 5시 20분쯤 서울 용산구 소재 극장 CGV. 교복을 입고 온 고등학생 이모(16)양은 쭈뼛대다 IMAX관 인근 대기 공간에 앉아 있던 정모(21)씨에 다가가 말을 걸었다. 어색함도 잠시, 두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 서로의 팔을 차례로 내밀며 팔찌를 교환했다. 정씨는 이양의 팔찌 중에 '공개적으로 말하다'는 뜻 'Speak out'이란 영문이 새겨진 팔찌를, 이양은 상대의 팔찌 중에 '한밤중'이란 뜻의 영문 'Midnights'가 적힌 팔찌를 골랐다. 이렇게 팔찌를 교환하기 위해 이양은 학교가 끝난 후 비즈를 하나하나 꿰매가며 꼬박 이틀 동안 팔찌를 만들었다. 처음 만난 여성 관객들이 이씨와 정씨처럼 서로 팔찌를 바꿔 끼는 모습을 상영관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3일 서울 용산구 CGV극장에서 10, 20대 여성들이 팔찌를 서로 교환한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모두 테일러 스위프트의 '디 에라스 투어' 공연 실황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이다. 양승준 기자

3일 서울 용산구 CGV극장에서 10, 20대 여성들이 팔찌를 서로 교환한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모두 테일러 스위프트의 '디 에라스 투어' 공연 실황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이다. 양승준 기자


한국 극장에도 등장한 '우정팔찌' 교환

극장에서 난데없이 팔찌 교환이라니. 이 낯선 문화는 요즘 미국을 대표하는 팝스타인 테일러 스위프트(34)의 '디 에라스 투어' 공연 실황을 담은 영화를 보러 온 일부 관객들이 주도했다. '우정팔찌' 교환은 스위프트 팬덤의 문화다. 스위프트의 앨범이나 곡명이 새겨진 팔찌를 직접 만들어 교환하며 관객끼리 친분을 쌓고 그 순간을 즐기자는 취지다. 스위프트가 지난해 낸 10집 '미드나이츠' 수록곡 '유어 온 유어 오운 키드'에서 '우정팔찌를 만들어 봐, 잠시 시간을 내 그 기분을 맛보고'란 뜻의 가사를 쓴 게 이 놀이의 기폭제가 됐다. 우정팔찌를 나누며 두려워할 필요 없이 당당히 너희(청춘)들의 삶을 꾸려가라는 스위프트의 응원에 미국 공연장에서 관객끼리 실제로 팔찌를 교환해 화제를 모은 유행이 영화 상영을 계기로 한국까지 상륙한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스위프트를 좋아했다는 정씨는 "컨트리 음악을 하며 말 잘 듣는 소녀로 지내다 '그래,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각성하고 그런 성장 과정을 음악적으로 풀어내는 스위프트의 방식이 너무 근사했다"며 "스위프트를 보며 '나도 사람들이 하는 말에 휘둘리거나 (공격을 받더라도) 쉬 쓰러지지 않고 좀 더 나아갈 수 있겠다'란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서울 용산구 CGV 대형 전광판에 걸린 테일러 스위프트 '디 에라스 투어' 실황 영화 광고판. 관객들이 주변에 모여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CGV제공

서울 용산구 CGV 대형 전광판에 걸린 테일러 스위프트 '디 에라스 투어' 실황 영화 광고판. 관객들이 주변에 모여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CGV제공

600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이 대형 상영관에서의 첫 회차(오후 6시)엔 스크린 맨 앞줄 시야제약석 6~8석을 제외하고 빈자리가 없었다. 관객 과반은 10, 20대(63.1%·CGV 집계)였다. 김민정(26)씨는 "에라스 투어 때 서울에도 온다는 소문이 퍼져 '드디어 보나'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결국 내년 2월 일본에만 가고 한국은 투어 일정에서 빠져 아쉬웠다"며 "큰 스크린(IMAX)에서 공연 실황이라도 보고 싶어 극장 티켓 오픈 시작부터 인터넷 창을 '새로고침'하며 표를 예매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스위프트의 내한 공연은 2011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테일러 스위프트가 8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소파이 스타디움에서 '더 맨'을 부르기 직전 팔뚝을 불끈 들어 올리며 관객과 대화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테일러 스위프트가 8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소파이 스타디움에서 '더 맨'을 부르기 직전 팔뚝을 불끈 들어 올리며 관객과 대화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요정'에서 '뱀'으로... 스위프트, 17년의 만화경

극장 스크린에 걸린 영상의 무대는 스위프트가 지난 8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소파이 스타디움에서 연 공연이었다. 그룹 방탄소년단이 2021년 공연했던 장소다. 상영시간 170분여 동안 관객들은 큰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도 공연처럼 호응했다. '크루얼 서머' 등 공연 초반부터 히트곡이 쏟아지자 일부 관객은 조용히 노래를 따라 불렀고 "손을 머리 위로 올려달라"는 스위프트의 말에 손을 들어 흔들기도 했다.

'디 에라스 투어'는 스위프트의 17년 음악 여정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무대였다. '레퓨테이션'(2017) '피어리스'(2008) 등 앨범 수록곡을 시대(Eras)별 콘셉트의 무대로 각각 엮었다. 그의 음악적 변화가 만화경처럼 펼쳐졌다. '베티' 등 '포크로어'(2020)의 수록곡을 부를 때 숲속 오두막 세트 지붕에 올라 요정처럼 노래한 스위프트는 그에게 '팝의 여왕'이란 왕관을 씌워준 '레퓨테이션' 앨범의 수록곡 '델리케이트' 등을 부를 땐 붉은색 뱀 문양이 수놓아진 의상을 입고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무대를 휘저었다. 기타 모양으로 길쭉하게 만들어진 무대는 그의 음악적 뿌리가 통기타, 즉 컨트리 음악에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테일러 스위프트가 2009년 MTV 비디오 뮤직 어워즈에서 여자 뮤직비디오 부문 최우수상을 받고 수상 소감을 말하려 하자 래퍼 카녜이 웨스트가 무대에 난입했다. 웨스트는 "비욘세의 비디오가 역대 최고"라고 말한 뒤 스위프트에 마이크를 돌려줬다. 넷플릭스 '미스 아메리카나' 영상 캡처

테일러 스위프트가 2009년 MTV 비디오 뮤직 어워즈에서 여자 뮤직비디오 부문 최우수상을 받고 수상 소감을 말하려 하자 래퍼 카녜이 웨스트가 무대에 난입했다. 웨스트는 "비욘세의 비디오가 역대 최고"라고 말한 뒤 스위프트에 마이크를 돌려줬다. 넷플릭스 '미스 아메리카나' 영상 캡처


테일러 스위프트가 미국 CBS 유명 토크쇼 '데이비드 레터맨'에 나와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겠다는 취지로 말하고 있다. 넷플릭스 '미스 아메리카나' 영상 캡처

테일러 스위프트가 미국 CBS 유명 토크쇼 '데이비드 레터맨'에 나와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겠다는 취지로 말하고 있다. 넷플릭스 '미스 아메리카나' 영상 캡처


테일러 스위프트가 그의 아버지와 정치적 소신을 밝히는 것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다. 넷플릭스 '미스 아메리카나' 영상 캡처

테일러 스위프트가 그의 아버지와 정치적 소신을 밝히는 것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다. 넷플릭스 '미스 아메리카나' 영상 캡처


'미국 국민 여동생'이 1020 롤모델 된 사연

스위프트는 '디 에라스 투어'로 미국 경제를 들썩이고(스위프트노믹스) 땅까지 흔드는 등(공연장 진동이 규모 2.3 지진급)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2006년 데뷔해 '컨트리 요정'으로 불리며 백인 중년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그는 2014년 앨범 '1989'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팝 음악을 선보이며 젊은 세대까지 사로잡았다. 업계에서 원하는 대로 착하게 '미국의 국민 여동생'으로 살았지만 2009년 MTV 비디오 뮤직 어워즈에서 래퍼 카녜이 웨스트로부터 음악적으로 모욕을 당하고 2015년 성추행 피해로 재판을 받으면서 음악, 사회, 정치적으로 적극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홀로 미국의 거대 연예 산업의 횡포와 여성 혐오에 맞서 싸우는 그의 모습에 10, 20대 여성들은 특히 열광했다. 김성환 음악평론가는 "스위프트는 성년이 된 뒤 컨트리 음악의 보수적 전통을 따르기보다 사회적 이슈에 진보적 목소리를 내고 음반제작사의 횡포에 맞서 옛 앨범을 재녹음해 다시 발매하며 가수로서의 창작의 대가를 지켜냈다"며 "거침없는 그의 행보들이 기성세대의 구태에 염증이 난 젊은 세대에게 롤모델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라며 '스위프트 신드롬'을 진단했다.

테일러 스위프트가 재녹음해 지난달 27일 다시 낸 앨범 '1989' 표지. 이 앨범은 2014년 처음 발매됐다. 리퍼블릭레코드 제공

테일러 스위프트가 재녹음해 지난달 27일 다시 낸 앨범 '1989' 표지. 이 앨범은 2014년 처음 발매됐다. 리퍼블릭레코드 제공


BTS·아미와 닮은 스위프트·스위프티

스위프트와 그의 열광적 팬덤은 그룹 방탄소년단과 '아미'의 공생과도 닮았다. 스위프트는 전 음반제작사가 계약 만료를 이유로 일종의 음악 사용권인 마스터권을 두고 몽니를 부리고 나중엔 아예 외부에 3억 달러를 받고 팔아버려 직접 만든 곡임에도 공연과 다큐멘터리 영상 등에 자유롭게 쓸 수 없게 되자 초기 앨범들을 다시 불러 재녹음 음반을 새로 냈다. 팬들(스위프티)은 음원 플랫폼 등에서 어떻게 하면 원곡을 재생하지 않고 스위프트가 다시 녹음한 버전을 들을 수 있는지를 인터넷에 공유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6일(현지시간) 빌보드에 따르면, 스위프트가 재녹음해 다시 낸 앨범 '1989' 수록곡들이 인기곡 주요차트인 핫100 1위를 포함해 톱10에 6곡이 줄줄이 진입했다. 10년 전 나온 옛 앨범에 실린 노래들이지만 가수의 권리를 찾아주려는 팬들이 그 노래들을 열정적으로 다시 소비하면서 최신 차트를 휩쓰는 이변을 연출한 것이다. 아미들이 K팝 선곡에 인색했던 미국 여러 라디오 방송사에 직접 전화를 돌리고 편지를 써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신청하고 빌보드에서 두각을 나타나게 한 과정과 비슷하다. 김도헌 음악평론가는 "스위프트는 소위 기획사나 매니지먼트 등 제3자를 거치지 않고 직접 팬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유대감을 쌓았다"며 "음악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가수와 팬덤이 함께 행동하고 목소리를 내면서 21세기 세계 대중문화 산업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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