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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계절이 사라지지 않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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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경쟁을 버텨내는 청년들에게 문학도 하나의 쉼표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작품 중 빛나는 하나를 골라내기란 어렵지요. 소설집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으로 제55회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한 송지현 작가가 청년들의 '자연스러운 독서 자세 추구'를 지지하는 마음을 담아 <한국일보>를 통해 책을 추천합니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겐 어쩐지 마지막 달인 12월보다 11월이 더 스산하게 느껴진다. 크리스마스를 비롯해 송년회들이 이어지는 12월이 파티 분위기라면, 11월은 좀 다르다. 미리 1년을 정리하며 좀 가라앉게 된달까. 매일 조금씩 사건들은 있었겠지만, 그래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겠지만, 이젠 기억도 나지 않고, 딱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채로 1년이 또 지났구나 생각하며, 작년 이맘때를 떠올렸다.
2022년은 내게 있어서 꽤 큰 사건들이 많았던 해였다. 특히나 연말에 여러 일이 있었고, 좋은 일도 있었지만, 작년 이맘때 나는 병원에 있었다. 맹장염, 정확히 말하자면 충수돌기염 때문에 수술을 하게 된 것이다. 분명히 아프긴 했지만 수술을 할 거란 생각은 못했다. 직장에 휴가를 내고, 어찌저찌 당일 저녁에 수술을 하게 되었고, 수술 예약을 잡은 후 집에 돌아가 짐을 챙겼다. 그때 챙겨간 책이 에밀리 M. 댄포스의 '사라지지 않는 여름'(다산책방, 2020)이었다. 이 책이 우리 집에 흘러들어오게 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언제부턴가 책장 가운데에 계속 존재하고 있었다. 두 권짜리 책이니 입원해 있는 동안 읽기엔 충분하겠지, 그런 생각을 했다.
책의 첫 문장은 이렇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그날 오후에 나는 아이린 클로슨과 함께 상점을 털고 있었다."
'아이린 클로슨'은 주인공 '캐머런'의 첫사랑이었다. 푹푹 찌는 다락방에서 열세 살의 캐머런은 아이린과 키스를 했고, 캐머런의 부모님은 그날 죽었다. 캐머런은 깊이 슬퍼하지만 동시에 ‘마음속 어딘가에서 (아이린과의) 사이를 들키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슬픔과 사랑을 영원히 비밀로 한 채 캐머런의 열세 살 여름이 지난다. 캐머런은 그 뒤로도 자신만의 비밀을 간직하면서, 간직하려 했으나 탄로 나면서, 많은 여름을 겪고 또 성장한다. 세상에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법을 알기 위해, 나 자신으로 존재하려고, 계절이 지난다. 소설은 캐머런이 망설임 없이 부모님이 죽었던 호수에 뛰어드는 장면으로 끝난다. 서늘한 여름밤, 캐머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모습을 지켜봐준다. 사랑은 곧 자유이며, 사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그 자체가 된다.
약에 취해 졸다 깨다 하며 책을 다 읽었다. 책을 완독하고 나니 배의 상처가 아물어 있었다. 책 속에선 끝없는 여름이 이어졌는데, 바깥은 어느새 겨울. 퇴원을 앞두고 이상하게 들떴던 기억이 난다. 좋은 책을 읽으면 그렇듯 무언가를 얼른 쓰고 싶은 기분이 들었고, 그 기분이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게도 전해진다. 지나간 계절은 그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남는 것 같다. 캐머런의 여름이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현재진행형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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