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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마약청정국, 느슨한 감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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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일이 심상찮게 돌아간다고 느낀 건 2021년 여름쯤이다. 무려 40여 명의 10대들이 마약류 진통제인 펜타닐 패치를 처방받아 학교 안팎에서 피우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어린아이들이 패치를 쉽게 처방해 준다는 병원들을 뱅뱅 돌며 가짜 고통을 호소했다. 그렇게 받아다가 남는 패치는 비싼 가격에 내다 팔아, 더 많은 패치를 사는 데 썼다. 친구가 패치를 너무 자주 처방받은 탓에 병원에서 자신마저 의심받게 됐다는 이유로, 환각 상태에서 폭행해 사망케 한 사건도 그 무렵 일이다.
최근 몇달은 막연한 두려움마저 생겼다. 약물에 취해 상대를 회칼로 위협하고 거리에서 네발로 기다가 경찰에 체포된 30대 남성의 영상을 보고는 등줄기가 바짝 서늘해졌다. 온몸을 괴상하게 꺾어대는 마약 중독자들이 모여 산다는 미국의 한 마을이 머릿속에 스쳐서일까. 지난 일주일간에만 두 명의 톱스타가 마약 투약 혐의로 경찰에 출석해 포토라인에 섰으니, 한때 '마약청정국'이었던 한국의 위상은 정말 옛것이 된 것 같다.
한번 몸집을 불린 마약 시장을 축소시키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마약 수사 현장에선 모두가 아는 진리. 최근 만난 한 경찰관은 "이제 한국도 마약 사범 규모를 현상유지만 해도 성공"이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국내 마약 사범이 지속적으로 늘어 최근엔 통계 작성 이후 처음으로 2만 명을 넘겼다. 마약 범죄 암수율(신고·검거되지 않은 비율)이 30배 정도로 추정되는 점을 감안하면, 마약 시장이 부풀 대로 부푼 것으로 보인다.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정부의 의지가 제대로 빛나야 할 시기에 찬물을 끼얹는 일들이 잇따른다. 공급망을 끊어내는 게 관건인 이 전쟁에서, 그 최전선에 선 인천국제공항세관 직원들이 필로폰 밀반입 사건에 연루돼 경찰 조사를 받고 있는 것이다. 조직원을 검사·검역대 구간이 아닌, 세관 구역으로 안내해 회피시켰다는 혐의다. 관세청은 "직원들의 개입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경찰은 검거된 조직원들의 진술이 구체적이라는 점을 근거로 사안을 깊게 들여다보고 있다. 만약 사실로 판명된다면, 세관 시스템 자체를 크게 손봐야 할 중대한 사안이다.
마약 사범에 대한 수사 현장의 안일한 대응도 문제다. '롤스로이스' 약물운전 사건에서 경찰은 변호사가 신원보증을 했다는 이유로 피의자를 석방했다. 사고 전 피부과 진료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피의자가 마약 전과가 있는 데다 피해자가 심하게 다쳤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한 처사였다. "초동 대처가 미흡했다"고 경찰청장까지 나서 사과했지만, 마약 수사의 주축인 경찰을 향한 신뢰는 이미 큰 상처를 입었다.
감시자들의 느슨한 행태는 마약 시장에 왜곡된 신호를 준다. 실제 '롤스로이스' 사건이 사회를 떠들썩하게 뒤흔든 후에도, 보란 듯이 약물을 투약하고 운전대를 잡았다가 사고를 내는 이들이 하루걸러 하나씩 입건되고 있다. 근본적으론 마약의 중독성이 빚은 일이겠지만, 경찰이 철저한 대응력으로 권위를 높였더라면 상황은 조금이나마 달라지지 않았을까. 한국이 아시아 마약 조직들에 떠오르는 타깃이 된 상황에서, 세관의 비위가 어마어마한 타격을 줄 수밖에 없는 건 말할 것도 없다.
"마약의 범람은 분위기를 탄다"는 법무부 장관의 말대로, '제대로 분위기를 탄' 한국의 상황은 적잖이 위태롭다. 연령과 방식의 제한 없이 확대되는 마약 범죄를 옥죄기 위해, 어느 때보다 날카로운 감시자들의 대처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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