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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쓰기에서 소설 건져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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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문학 첨단의 감수성에 수여해 온 한국일보문학상이 56번째 주인공을 찾습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10편. 심사위원들이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본심에 오른 작품을 2편씩 소개합니다(작가 이름 가나다순). 수상작은 본심을 거쳐 11월 하순 발표합니다.
천운영이 10년 만에 펴낸 소설집 ‘반에 반의 반’은 마치 받아쓰기를 한 듯한 형식으로 쓰여 있다. 인터뷰이에게 녹음기를 들이밀어 육성을 따는 풍경이 고스란히 노출된다. 연로한 부모, 큰아버지, 이모들과 고모들, 친구의 딸과도 마주 앉는다. 작중 인물들은 말한다. 기억은 처지대로 입맛대로 가공돼 믿을 게 못 된다, 네가 모르는 얘기 하나 해주겠다. 작중에서 작가는 아예 이 이야기는 소설이 아니라 이 양반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들려주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그래서 소설은 언어로나 사연으로나 천운영 소설 특유의 실감으로 충만하다.
작가라는 존재는 가끔 제 가족 이야기를 받아 적으라고 태어난 자식인 듯싶을 때가 있는데 ‘반에 반의 반’은 얼핏 그런 외양을 하고 있다. 소설집은 세대를 거슬러 집안 딸들의 서사로 빼곡하다. 가장 눈길이 가는 인물은 기길현 할머니다. 이제는 망자가 된 길현씨는 노년에 시아버지의 후취였던 나이 어린 시어머니를 불러들여 아옹다옹하며 지내고, 꽃놀이 갔다가 달고 온 고아 남매를 식구로 거두어 살았다. 할머니는 여러 단편들에 겹쳐서 등장해 마치 연작소설을 읽는 느낌을 자아낸다.
그렇지만 받아만 적어도 소설 몇 권은 될 거라는 구구한 사연들이 왜 소설이 되지 않는 걸까. ‘기길현 할머니 받아쓰기’는 이 지점을 잘 보여준다. 표제작 ‘반에 반의 반’에서 큰아버지는 과거 할머니의 사연 한 토막을 부끄러운 일로 기억하면서 그 얘기는 쓰지 말라고 극구 만류한다. 이율배반적으로 소설가 손녀는 이 부분을 공들여서 쓴다. 그 얘기야말로 할머니나 그녀의 장남이었던 큰아버지에게 ‘환한 풍경’이었으리라 믿는다. 다른 단편 ‘우리는 우리의 편이 되어’에서는 모든 선량한 관계에서도 기꺼이 누군가의 편이 되어야 한다면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의 편이 되겠다고 얘기한다. ‘아버지가 되어 주오’의 어머니 인생은 어떤가. 딸의 눈에는 평생 아버지에게 당하고만 산 어머니가 남편에게 아버지 역할을 했다고 고백한다.
천운영은 모든 인생이 노정한 한계를 직시하면서도 이런 듣기를 통해 섬세한 이해의 장으로 나아간다. 목소리를 그대로 들려준다는 건 다름 아닌 다른 삶의 결을 옮겨 주는 일인 것이다. 이건 사연 위로 조금씩 넘치는 부분으로서 마땅히 소설이 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반에 반의 반’은 무엇을 말하는가? 상상의 분량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받아쓰면서 찾아낸 생에 대한 아름다움의 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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