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살려고 귀순했는데 北은 풍년 타령… 식량난의 실체 [문지방]

입력
2023.11.05 13:00
구독

편집자주

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살려고 왔다."

동해 목선 월남 북 주민

북한 주민 4명이 강원도 속초 인근 해상을 통해 귀순한 지난달 24일 해경 선박이 이들이 타고 온 소형 목선을 인근 군부대로 예인하고 있다. 뉴스1

북한 주민 4명이 강원도 속초 인근 해상을 통해 귀순한 지난달 24일 해경 선박이 이들이 타고 온 소형 목선을 인근 군부대로 예인하고 있다. 뉴스1

지난달 24일 7.5m 크기의 목선을 타고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온 북한 주민 4명은 정부의 합동심문에서 이같이 말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출발지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북한의 해안 경비를 뚫기 위해 조그만 목선을 타고 먼바다로 크게 돌아 남쪽으로 내려온 그들의 항해 일지는 사투의 기록이었을 겁니다. 그들이 이처럼 목숨 건 월남을 감행했던 이유는 굶주림이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의아합니다. 북한 당국은 언론을 통해 '풍작' 선전에 여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국내 전문가들의 분석은 엇갈립니다. '제2고난의 행군'이라며 아사자가 나올 정도로 식량이 부족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일각에선 "북한의 식량난이 과장됐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최근 러시아가 북한에 밀 5만 톤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는데, 북한이 "올해 상당히 좋은 수확량을 달성해 지금은 괜찮다"며 거절한 것을 두고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실제로 그만큼 작황이 좋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소소한 식량 지원으로 대량의 포탄 지원을 눙치려는 시도를 원천 차단하겠다는 포석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지난달 24일, 올해 태풍 6호로 큰 피해를 입었던 북한 강원도 안변군 오계농장과 월랑농장에 '복 받은 대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조선중앙TV 화면 캡처

지난달 24일, 올해 태풍 6호로 큰 피해를 입었던 북한 강원도 안변군 오계농장과 월랑농장에 '복 받은 대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조선중앙TV 화면 캡처

먼저 노동신문의 북한 풍작 보도를 살펴보겠습니다. 9월엔 "흐뭇한 작황이 펼쳐졌다"며 '복 받은 대지'라는 글귀가 새겨진 황금빛 논 사진을 게재했습니다. 지난 8월 태풍 '카눈'의 영향으로 피해를 입었던 강원도 오계농장과 월랑농장의 벼 수확 현황을 전하며 "벼 포기들이 폭우에 잠겼던 때는 상상도 못했던 풍요한 가을을 맞이했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과학기술적 농사의 성과를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농업 정책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 북한 당국은 올해 경제분야에서 반드시 달성해야 할 12개 중요 고지 중 '알곡 고지'를 첫 손에 꼽으며 식량문제 해결에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김 위원장은 코로나19 여파로 국경이 봉쇄되면서 지난 3년간 식량을 자급해야 하는 어려운 숙제를 안게 됐습니다. 북중 접경지역에 사는 한 북한 주민이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국경 봉쇄 당시를 떠올리며 "처음엔 코로나19에 걸려 죽을까 두려웠지만, 곧 굶어 죽는 걸 걱정하게 됐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8월 6호 태풍 '카눈'에 의한 폭우로 피해가 발생한 강원도 안변군 일대를 다시 찾아 굳은 얼굴로 논을 바라보고 있다. 김 위원장은 농장 복구작업에 공군까지 투입하며 농업생산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고 주문했다. 평양=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8월 6호 태풍 '카눈'에 의한 폭우로 피해가 발생한 강원도 안변군 일대를 다시 찾아 굳은 얼굴로 논을 바라보고 있다. 김 위원장은 농장 복구작업에 공군까지 투입하며 농업생산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고 주문했다. 평양=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올해 상반기만 해도 북한의 식량 사정은 좋지 않았습니다. 보통 4월에 시작됐던 보릿고개가 두 달 앞선 2월 시작됐습니다. 당시 통일부 관계자는 "일부 지역에서 아사자가 속출하는 등 식량난이 심각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식량 가격도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지난 5월 서해를 통해 탈북한 두 일가족은 "일부 마을에서 인육 취식 사건이 발생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로 식량난이 극심하다"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불과 몇 개월 만에 북한의 식량 사정이 급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대규모 식량 원조를 받은 것도 아니니까요. 김영호 통일부 장관이 지난달 열린 국회 국정감사에서 "북한의 선전 내용과 주민 식량난 현실에는 차이가 있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런데 막상 북한 식량 사정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위성 사진을 통해 본 북한 농촌의 가을걷이 상황을 보면 실제로 풍작일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통계청 자료에서도 북한의 곡물 생산량이 조금씩이나마 꾸준히 증가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1년 북한의 식량 총생산량은 469만2,000톤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던 2016년 482만3,000톤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고난의 행군 이후 최악의 식량난을 겪었던 2007년엔 400만5,000톤에 불과했습니다.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쌀만 놓고 봤을 때 북한의 2021~22년 쌀 자급률은 95.1%로 중국과 맞먹는 수준입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1일 "수도의 거리들, 대동강반 유보도와 공원, 휴식터 등 이르는 곳마다에 단풍이 붉게 탄다"며 평양의 가을 모습을 전했다. 평양=노동신문 뉴스1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1일 "수도의 거리들, 대동강반 유보도와 공원, 휴식터 등 이르는 곳마다에 단풍이 붉게 탄다"며 평양의 가을 모습을 전했다. 평양=노동신문 뉴스1

대체 무엇이 진실인지 헷갈립니다. 북한의 농업 역량이 증대된 것도, 주민들이 식량난을 겪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면 주목할 것은 '배급'입니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이지선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연구위원이 한국개발연구원(KDI) 북한경제리뷰에 게재한 연구 결과의 결론은 "북한의 식량 위기는 생산량의 절대 부족이 아닌 분배 유통 또는 저소득층의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된다"는 것입니다. 엘리트와 도시민에게 편향된 차별적 식량 배급 시스템이 문제라는 것이죠. 이 부연구위원은 지난해 본격 도입된 김정은 정권의 신양공정책이 저소득층의 식량난을 가중시켰다고 진단했습니다. 현 상황에서 상당히 설득력 있는 분석으로 보입니다.

북한 매체의 보도를 보면 평양 시민들은 나름대로 양질의 교육과 생활 편의를 누리고 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북한도 계층 간, 지역 간 격차가 아주 심각한 것 같습니다. 북한의 국경 봉쇄가 느슨해진 만큼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목숨을 걸고 탈북하는 저소득층 주민들은 더 늘어날 전망입니다. 우리 정부가 이들에 대한 정착 지원과 통일 정책에 소홀함이 없길 기대합니다.


김경준 기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