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기사
의대 안 간 걸 후회하는 이유
이미 가입된 회원입니다.
만 14세 이상만 회원으로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과학 연구나 과학계 이슈의 의미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일들을 과학의 눈으로 분석하는 칼럼 ‘사이언스 톡’이 3주에 한 번씩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대학 교정 잔디밭에 의자 하나가 넘어져 있다. 대다수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을 그 모습이 등교하던 한 학생의 눈에 밟혔다. 연구가 잘못돼서, 시험을 망쳐서,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 이들의 처지를 닮은 것 같다고 생각해서다. 학생은 의자를 카메라에 담았다.
지난달 23일 이 사진이 대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전시됐다. ‘누군가 일으켜 준다면’이란 제목으로 넘어진 의자 사진을 출품한 학생은 “지금은 비록 누워 있지만, 네 다리 성하고 부러진 곳 없으니 누군가 일으켜 준다면 금방 제 역할을 할 수 있겠지. 실패한 사람도 그럴 것”이라고 했다. 의자와 같은 처지에 있다고 여긴 학생들이 절절히 공감했다.
트레드밀 사진도 전시됐다. 제목은 ‘제자리걸음’. 출품한 학생은 “날마다 열심히 뭔가를 하지만 눈에 띄는 결과물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제자리를 걷고 있는 느낌”이라고 했다. 연구도 공부도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잘 하고 있는 건지 확신이 안 서고, 어쩌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쑥불쑥 불안감이 솟는 스스로를 그 사진을 보며 다독였을 것이다.
과학도들이 일상에서 포착한 실패의 순간을 담은 사진들을 전시한 이 행사는 KAIST ‘실패주간’의 시작을 알렸다. 하이라이트는 1일 열린 ‘망한 과제 자랑대회’였다. 당사자가 직접 털어놓은 실패담들은 때론 익살이, 때론 안타까움이 가미되며 공감을 얻었다. 실패주간을 주최한 KAIST 실패연구소는 과학을 선도하기 위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도전하자는 뜻에서 2년 전 설립됐는데, 학생들을 이번 대회에 참여하도록 설득하기까지 꽤나 시간이 걸렸다는 후문이다.
과학자의 길을 만류하는 주변 유혹을 뿌리치고 젊음과 미래를 건 연구가 길을 잃었을 때, 이공계 학생들의 마음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다시 하면 된다, 괜찮다는 위로에도 겪어 내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 친구들이 우수한 논문을 내며 과학자로 자리 잡아 가는 모습과 스스로를 비교하면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다, 의대를 택한 친구들이 어느새 의사 선생님 소릴 듣는다는 소식까지 들으면 이러다 연구만이 아니라 인생까지 실패하는 건 아닌지 덜컥 겁이 난다는 등의 자책과 고민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쌓여 있다.
실패에 너그럽지 못하고 다시 일어서길 기다려주는 데 인색한 우리 사회 분위기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란 말을 공허하게 만든다. 실패 가능성이 상존하더라도 하고 싶은 연구, 해야 하는 연구에 몰입하려는 과학도들을 위축시킨다. 같은 이공계지만 상대적으로 진로와 수입이 보장되는 의대에 학생이 몰리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연구가 안 풀릴 때마다 미래가 불안해지면 의대 안 간 걸 자꾸 후회하게 되고, 그런 선배들 모습을 보며 일찌감치 반수, 재수에 뛰어드는 후배들이 늘어간다.
그렇게 의대 문턱을 넘으면 성공일까. 취재차 만난 한 의사과학자는 정작 다른 얘길 전했다. “막상 의대 들어와 보니 잘못 왔다고 생각하는 학생이 적지 않다. 분위기에 떠밀려 의대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과학자가 되고 싶은 학생이 없어서 의대 광풍이 부는 게 아니다.
세상에 실패를 공개한 학생들 모습에는 ‘진심’이 담겼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기에 실패 앞에 당당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을 살리는 데 진심인 학생이 의대를 가고, 연구에 진심인 학생은 주저 없이 자연대, 공대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KAIST 학생들의 용기 있는 시도가 진로 선택의 왜곡을 바로잡는 밑거름이 되길 바란다.
신고 사유를 선택해주세요.
작성하신 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로그인 한 후 이용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구독을 취소하시겠습니까?
해당 컨텐츠를 구독/취소 하실수 없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