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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난세인가, 평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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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지금은 난세인가 평시인가. 난세의 정치와 국난극복 이후의 리더십은 어때야 하나.
역사에 대한 본질적이고 기초적인 질문이다. 세상이 위태로울 땐 영웅이 그립다. 정치 자체는 평범한 일반직업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그래서 정치 지도자는 난관을 극복하고 기회로 활용해 국민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 일제강점기 때는 이민족에게 분노하고 대항해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독립운동이 바로 정치의 주 무대가 된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에는 늘 노선투쟁과 돈 문제가 필연적으로 뒤따르기 마련이다. 갈등구조의 형식이 시대가 바뀌어도 별반 다르지 않다.
’무장투쟁론’의 이동휘(李東輝)와 ‘외교독립론’ 이승만(李承晩)의 격렬한 대립이 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임시정부 대통령인 이승만이 미주지역 동포들의 독립후원금을 독단적으로 사용해 문제가 됐고, 국무총리 이동휘는 레닌으로부터 지원받은 혁명자금 분배문제로 물의를 일으켜 지도자들이 분열했다. 좌우가 합작한 상해임시정부는 일제의 탄압에 내부적 파벌 혼선까지 겹쳐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광복 이후에는 박정희의 경제성장 이면에 반독재 투쟁의 도도한 흐름이 한국인의 ‘저항 DNA’를 물려받았다. 하와이 동포들이 가혹한 노동의 대가를 이승만에게 한 푼이라도 더 전달하려던 독립활동 자금의 혼은 군사독재시절 김대중(DJ) 진영에 쇄도한 시장 아주머니의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몇 푼의 애절함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를 쟁취한 건 생각보다 최근의 역사다. 일제 당시 한성임시정부와 중국에 거점을 둔 여러 임시정부들이 난립했듯이, 1980년 신군부 등장 직후 국내에선 김영삼이 제도권 밖으로 밀려난 채 투쟁 중이었고, 미국으로 망명한 DJ는 현지에서 한국민주화 지지활동을 펼쳤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큰 산을 넘어서면서 국가적 난제의 체감도는 낮아졌다. 그러자 노무현이 지역주의 타파의 시대적 담론을 몸으로 실천하고 나선다. 외적과 싸우거나 군사통치는 벗어났지만 한국 내부갈등의 뇌관을 건드린 것이다.
다만 난세에서 어느 정도 숨 돌린 건 분명해 보인다. 헌정사에 기록된 역대 국회의원 임기를 보면 알 수 있다. 1948년 5·10총선거로 구성된 제헌의회 임기가 2년짜리였던 반면, 8대 국회는 10월 유신 정변으로 4년을 채우지 못하고 1년 3개월로 막을 내렸다. 6년이던 10대 국회는 10·26참변으로 1년 7개월 만에 중단됐다. 신한민주당 돌풍으로 탄생한 12대 국회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위해 3년으로 임기를 반납한 후 35년간 국회 재임기간이 유지된 걸 보면 헌정질서가 안정기에 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이제 난세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일까. 박근혜 탄핵이라는 초유의 격변이 있었다. 이 과정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공정과 상식’이다. 현재의 우리 국민이 일상에서 가장 흔히 떠올리는 가치라고 본다. 이것으로 문재인 정부가 탄생했고 검찰개혁 와중에 터져 나온 권력의 사유화로 이를 스스로 위반하면서 정권연장에 실패했다. 이때 공정과 상식을 기치로 검찰총장직을 내던지고 정치입문 8개월 만에 대권을 잡은 사람이 윤석열 대통령이다. 윤 대통령은 이 시대적 담론을 다시 정면에서 마주 서야 한다. 그러려면 권력의 행사는 정의롭고 공정해야 한다. 이 문제를 회피하니 뜬금없는 ‘자유’와 ‘이념전쟁’으로 공허함을 달래는 것이다. ‘3대 개혁’(노동·연금·교육) 국정과제는 하나의 수단일 뿐 목적이 될 수 없다. 윤 정권이 공정과 상식 과제를 극복해야만 한반도 통일과 우리 역사 최초의 세계 5강 진입 목표로 넘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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