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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뒤 온 '물먹은' 5조 원짜리 보도자료

입력
2023.11.03 04:30
수정
2023.11.03 11:23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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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를 국빈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10월 25일(현지시간) 도하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카타르 비즈니스 포럼에 참석하고 있다. 윤 대통령 왼쪽은 정기선 HD현대 사장. 연합뉴스

카타르를 국빈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10월 25일(현지시간) 도하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카타르 비즈니스 포럼에 참석하고 있다. 윤 대통령 왼쪽은 정기선 HD현대 사장. 연합뉴스


10월 26일 오전 10시 04분. 이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람이 떴다. 메일함을 열었더니 '[HD현대 알림자료] HD한국조선해양, LNG 운반선 17척 5조2,511억 원 수주'라는 제목의 보도자료였다. 그런데 온라인에는 하루 전부터 똑같은 내용을 다룬 기사가 수십 건 올라와 있었다. 새로운 계약을 딴 내용이 해당 기업이 공식적으로 알리기도 전에 기사로 나간다? 가끔 한 매체가 특종 보도를 하고 '물먹은' 다른 언론이 뒤따라 쓸 때나 있는 일이지만 이날은 그렇지 않았다. 전날 대통령실이 해당 내용을 언론에 알려 이를 바탕으로 먼저 쓴 기사들이었다.

그러니 HD현대는 자신들이 이뤄낸 성과를 제대로 알릴 기회조차 얻지 못한 셈이다. 심지어 '단일 계약 기준 한국 조선업계 사상 최대 수주 금액'이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웠는데도 말이다. 보통 이 정도면 기념사진 찍고 이를 담은 보도자료를 만들어 언론에 떠들썩하게 알린다. 떡을 돌리고 한바탕 잔치를 벌여도 모자랄 판에 고작 배 사진 한 장 들어 있는 썰렁한 보도자료를 다음 날 보내는 것으로 갈음했다. 게임이 이미 끝난 뒤였던 터라 '본 알림자료는 즉시 게재 가능합니다'라는 보도자료 속 문장은 초라해 보였다.

HD현대 측은 이번 계약 상대인 카타르에너지와 9월에 합의각서(MOA)를 체결했다. 부회장이 직접 카타르 에너지 담당 국무장관과 서명까지 했다. 업계에서는 이 정도면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계약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봤는데 마침 한 달 뒤 대통령의 국빈 방문 때 계약이 확정됐다. 9월 당시 보도와 국빈 방문 기간 나온 기사들을 비교해 보면 계약 내용은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조선업계뿐만 아니라 최근 만난 여러 기업 관계자들이 HD현대의 카타르 계약 이야기를 꺼낸다. 현 정부가 기업과 그 활동을 어떻게 대하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줬다며 씁쓸해하는 이가 적지 않다. 사실 이번 계약은 3년 전인 2020년 국내 조선업계 '빅3'인 HD현대, 삼성중공업, 한화오션(옛 대우조선해양)이 압도적 기술력으로 카타르 정부, 해운업계, 에너지업계를 상대로 적극 영업을 펼친 결과라는 평가가 많다. 카타르에너지는 151척의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발주를 계획했는데, 그중 일부를 HD현대가 따온 것이다.

28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에서 170개 회원국의 투표로 2030 세계박람회(엑스포) 개최지가 결정된다. 후보지 부산시와 중앙정부도 열심히 뛰었지만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들과 대한상의 등 재계 단체 역시 세계 곳곳을 훑으며 표밭을 다졌다. 총수는 물론 계열사 최고경영자(CEO)와 임원들이 시시때때로 자신들이 맡은 국가의 정·재계 인사들에게 한국과 부산을 알렸다. 아직까지는 오일 머니를 앞세운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가 다소 앞서지만 우리도 충분히 역전을 노려볼 만하다는 기대도 크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엑스포 유치에 실패하면 특정 대기업이 욕받이나 희생양이 될 것이라는 흉흉한 말도 돌고 있다. 결과가 어떻든 고군분투한 기업과 재계 관계자들에게 박수와 격려를 잊지 말자. 올림픽이든 월드컵이든 또 다른 엑스포든 그들은 또 한 번 발 벗고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박상준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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