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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한 세월, 유정한 인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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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면 신발 끈을 묶는 아침. 바쁨과 경쟁으로 다급해지는 마음을 성인들과 선현들의 따뜻하고 심오한 깨달음으로 달래본다.
학생 시절, 어떤 기독교 모임에 갔다가 들은 이야기다. 연만한 목사님 한 분의 경험담이었는데, 전쟁 때 산속으로 피란 가서 소나무를 앞에 두고 '회개하라, 소나무여, 천국이 다가왔다' 외치며 설교 연습을 했더란다. 심심해서 한 짓인데, 명 설교자로 이름을 날리게 된 목사님은 그게 헛짓은 아니었노라 했다.
삼국유사의 의해(義解) 편은 고승의 전기가 모인 곳이다. 그 가운데 승전(勝詮)이라는 스님은 여기 말고 다른 기록이 없어, 그가 의상(義湘)의 문하로 중국 유학까지 마친 학승이란 사실을 확인하는 소득이 크다. 중국에서는 화엄학 종가 현수(賢首)의 문하에 들었는데, 끝내 승전은 '미묘한 것을 연구하고 깊은 생각을 쌓아 지혜와 보는 눈이 뛰어났으며, 깊은 것과 숨은 것을 찾아 심오한 진리가 최상에 이르렀다'고 치하받는다. 어지간한 고승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 현수는 의상과 동문수학한 바로 그이다. 승전이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하자, 현수는 자신의 저서와 편지를 의상에게 부치며 '저번 보내주신 금 9푼, 이제 인도 사람이 쓰는 물병과 대야를 하나씩 보내 작은 정성이나마 표시'하는 것으로 보아, 동기간 주고받는 정이 돈독하여 옷깃을 여미게 된다.
돌아온 승전은 무엇을 했을까? 여기서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지금의 경북 김천 가까이에 암자를 짓고, 돌로 만든 해골들을 상대로 화엄경을 강의했다는 것이다. 그의 제자가 남긴 글에도, '해골들을 이끌고 논의하고 가르쳤다' 하고, '해골 80낱 정도가 전하고 있는데, 신령스러운 이적이 자못 많다'고 덧붙인다. '돌로 만든 해골'이란 진짜가 아니고 백골 모양일 것 같다. 화엄경을 배우는 백골이라니, 참 별스럽다.
이야기의 원형을 찾자면 장자(莊子)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장자가 길을 가다 마른 해골을 만나거니와, 그런 백골에 어찌하다 이렇게 되었는지 묻자, 백골 주인이 꿈에 나타나 죽음의 세계를 일러준다는 얘기다. 둘이 만나 삶의 이쪽저쪽을 오가는 장자 특유의 우화이다. 지락(至樂) 제18에 나온다.
장자는 백골과 대화를 나누지만 승전은 백골을 가르친다. 내가 학생 시절 만난 목사님이 소나무에게 했다는 설교 같은 것일까? 소나무가 어찌 되었는지 뒷이야기를 못 들었으나, 화엄경 배운 백골은 자못 많은 이적을 베풀었다고 한다. 무정물(無情物)에 유정을 불어넣은 옛이야기가 가상한데, 유정해야 할 인심이 무정한 세월을 만드는 지금의 세태가 안타깝다. 이태원 참사 1년이어서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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