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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노동자 이탈은 농업에 재앙"… 돈으로 노동자 붙잡는 이스라엘

입력
2023.10.26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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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총리 "인센티브 제공·월급 미루는 경우도"
가족 생계 책임지는 탓, 위험 알아도 귀국 못해

12일 태국 방콕 수완나품 국제공항에서 한 여성이 이스라엘에서 일을 하다 전쟁을 피해 돌아온 가족을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방콕=AP 연합뉴스

12일 태국 방콕 수완나품 국제공항에서 한 여성이 이스라엘에서 일을 하다 전쟁을 피해 돌아온 가족을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방콕=AP 연합뉴스

이스라엘 농장주들이 전쟁을 피해 떠나려는 태국 노동자들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현금을 추가 지급하는 농장주가 있는가 하면, 일부는 ‘월급 미지급’이라는 치졸한 수법까지 이용해 외국인 노동자들의 발을 계속 묶어 두려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느 쪽이든 ‘돈’을 핵심 수단으로 삼고 있는 셈이다. 실제 빚을 갚거나 고향에 있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이스라엘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도 다수인 것으로 나타났다.

26일 태국 방콕포스트에 따르면 스레타 타위신 태국 총리는 최근 오르나 사기브 주태국 이스라엘 대사와의 통화에서 “이스라엘 농장 고용주가 태국 노동자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거나, 급여 지급을 미루는 방식으로 현지를 떠나지 못하도록 붙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돈을 매개로 위험 지역에 남게 만드는 건 옳지 않은 일”이라고 일침을 날렸다.

지난 7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 공격으로 숨진 태국인은 30명에 달한다. 하마스에 인질로 억류된 태국인도 54명인 것으로 전해졌다. 불안을 느낀 태국인 노동자들이 이스라엘 탈출에 나서자, 이스라엘 농장주들이 온갖 ‘꼼수’로 이들의 귀국을 막고 있다는 얘기다.

스레타 총리는 지난 23일에도 “돈이 아무리 많아도 목숨보다 소중하지 않다. 당장 돌아오라”고 호소했다. 이스라엘 측은 인센티브 제공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월급을 일부러 늦게 주고 있다는 의혹은 부인했다.

현재 이스라엘에는 태국인 약 3만 명이 있다. 이 가운데 결혼이주자, 서비스 산업 종사자(2,000명)를 뺀 나머지 2만8,000여 명은 대부분 키부츠(집단농장) 등 농업 분야에서 일한다. 노동자 75%는 전쟁 지역인 가자지구에 거주하고 있다. 일할 사람이 없으면 농작물 생산량 급감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불안에 고용주들이 태국인 노동자의 귀국을 막고 나선 셈이다.


12일 태국 방콕 수완나품 국제공항에서 이스라엘에서 일을 하다 태국으로 돌아온 남성이 아내와 자녀를 끌어안고 있다. 방콕=AFP 연합뉴스

12일 태국 방콕 수완나품 국제공항에서 이스라엘에서 일을 하다 태국으로 돌아온 남성이 아내와 자녀를 끌어안고 있다. 방콕=AFP 연합뉴스

가자지구 국경 근처 키부츠의 과수원 감독관 가드 샤파러는 현지 매체 타임스오브이스라엘에 “태국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의 이탈은 이스라엘 농업에 재앙”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농장에 외국인 노동자를 소개하는 인력관리 회사의 대표도 “우리는 곧 먹거리를 생산하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자발적으로 이스라엘에 남는 사람도 많다. 현재까지 태국 귀국을 신청한 이스라엘 내 태국인은 8,000명이다. 이 가운데 3,600명이 태국 땅을 밟았다. 나머지 2만여 명은 언제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기로 했다.

영국 BBC방송과 태국 매체 엠지알은 ‘잔류 이유’를 돈에서 찾았다. 올해 2분기 태국의 월평균 임금은 1만5,412바트(약 57만 원)인데, 이스라엘에서 일하면 매달 5만5,000바트(약 204만 원)를 벌 수 있다. 노동자 대부분은 월급 대부분을 본국에 송금한다. 고국에 있는 가족의 생계가 걸린 만큼, 이스라엘을 떠나기 힘든 형편이다. 게다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인력사무소에 수수료 명목으로 평균 10만 바트(약 260만 원)를 지불한 터라, 이 과정에서 발생한 채무를 갚으려면 중도 귀국할 수도 없다.

하지만 태국 정부 입장에선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으로 숨지는 태국인이 더 나올까 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 태국 정부는 이스라엘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귀국할 경우, 소정의 보상금을 지급하고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유인책을 고민하고 있다.

하노이= 허경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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