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적으로 혁신하는 한국의 정당들
비대위 정치는 가면무도회 같은 가식
'화장 여당', '생얼 야당' 모두 심판해야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패배한 민주당이 정책을 쇄신하겠다면서 혁신위원회를 만들어서 한동안 세상을 시끄럽게 하더니 이번에는 강서구 보궐선거에서 패배한 국민의힘이 혁신위를 만들었다. 어느 교수가 위원장을 하면서 좌충우돌했던 민주당의 혁신위가 무엇을 혁신했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의사를 천직으로 알았던 사람을 위원장으로 초빙한 국민의힘이 무엇을 혁신하겠다는 것인지는 보지 않아도 대충 짐작할 것이다. 선거에 패배한 후, 그리고 선거를 앞두고 정당이 급조한 혁신위는 하도 많이 해서 새로 내놓을 만한 메뉴가 떨어져 버린 지가 오래됐다. 툭하면 습관적으로 혁신을 하는 우리 정당들의 오늘날 모습이 이 모양 이 꼴이니 한심하고 슬픈 일이다.
'혁신'으로 부족하면 그다음에 등장하는 것이 '비상대책'이다. 한국 정당은 툭하면 비상사태가 터져서 비대위를 만들기 때문에 이제는 '초(超)비대위' 정도는 만들어야 그 정당이 비상한 상태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번에 국민의힘이 혁신위를 발족시키자 몇몇 평론가들은 2012년 총선을 성공적으로 치른 박근혜 비대위를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의 승리가 점쳐졌던 2012년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승리했고 그 연장선에서 박근혜는 대선에서도 승리했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자신의 집권을 가능케 한 정책과 사람을 팽개쳤으니, 박근혜 비대위는 잘 짜여 진 가면무도회였다. 가면을 벗어버린 맨얼굴의 정치가 망가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고 결국 박 전 대통령은 탄핵을 당하고 말았다.
민주당은 2016년 총선을 김종인 비대위 체제로 치러서 1석 차이로 원내 1당이 되는 성공을 거두었다. 호남 의원들이 대거 탈당하는 등 당이 위기에 처하자 구원투수로 등장한 김종인은 친노 패권주의를 타파하겠다고 선언했으나 대선을 앞두고 자기가 탈당하고 말았다. 김종인 비대위도 잠시 성공한 가면무도회였고, 김종인이 떠난 민주당은 친노·친문당으로 원상 복귀하고 말았다. 2016년 총선에서 제3당으로 화려하게 등장한 국민의당도 어느 당 못지않은 비대위 역사를 자랑했다. 20대 국회 초에 있지도 않았던 리베이트 의혹으로 박지원 비대위 체제가 오래 지속됐고, 2017년 대선 패배 후에는 박주선 비대위가 들어섰다. 박주선 비대위에선 혁신위가 맹렬하게 활동을 하더니 결국엔 안철수가 다시 대표가 돼서 바른정당과 무리하게 합당을 했다. 이렇게 생겨난 바른미래당은 2018년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후 자멸하고 말았다.
이처럼 우리 정당은 혁신위원회, 선거, 그리고 비대위원회로 이어지는 과정을 쳇바퀴 돌듯이 반복하고 있다. 수없이 많은 혁신위원회와 비상대책위원회가 명멸했음에도 우리의 정당 정치는 나아지기는커녕 악화일로를 가고 있다. 나날이 저질화하고 있는 정당들이 명맥을 유지하면서 헌법기관인 국회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동력은 국고로 지급하는 정당 보조금에서 나온다. 기성 정당이 정당 보조금을 독식하기 때문에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할 가능성은 가로막히고 유권자들은 지긋지긋한 두 정당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선거를 앞두고 여당이 내세우는 혁신위는 맨얼굴을 가리겠다고 화장(化粧)을 하는 것임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알량한 보궐선거에서 승리한 야당은 아예 적나라(赤裸裸)한 맨얼굴로 총선을 치를 기세다. 내년 총선에서 화장을 하고 나서는 여당과 맨얼굴로 나서는 야당을 동시에 심판해서 새 판을 짜지 못하면 우리 정치는 나락(奈落)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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