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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無)의 건축이 도시를 움직인다

입력
2023.11.06 04:30
24면

<3> 보이지 않는 건축

편집자주

'정태종의 오늘의 건축'은 치과의사 출신의 건축가인 정태종(58) 단국대 건축학부 조교수가 국내외 현대 건축물을 찾아 각 건축의 지향점과 특징을 비교하고 관련된 이슈를 소개하는 기획입니다. 4주에 1번씩 연재합니다.


그 옛날 인류는 땅을 파고 지붕을 만들어 움막을 지었다. 이후 건축은 땅에서부터 나온 공간이자 거주하는 장소가 됐다. 기존의 건축은 건축물이 세워질 땅, 즉 대지가 있어야만 가능했다. 땅이라는 부동산은 고정되고 한정된 재화이며 주로 경제적인 가치로 평가된다. 현대 도시와 건축은 한정된 땅에 수많은 사람을 위한 다양한 공간을 만든다. 건축은 대지에서부터 솟아올라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초고층이 되어 권력을 상징하기도 하고 누구에게나 눈에 띄는 도시의 랜드마크가 되기도 한다. 그 결과 인공물인 건축은 대지라는 자연과 이분법적으로 나뉘게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둘 간의 관계는 더욱더 극단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현대 도시에는 이와는 반대로 대지와 건축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려고 시도하는 건축도 있다. 현대건축 중 숨어 있어 드러나지 않는 그래서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건축 사례를 찾아가 보자.

지하 공간과 위상학적 연산

조반니 바티스타 피라네시의 가장 잘 알려진 카프리치오 작품 '상상의 감옥'. 위키피디아 캡처

조반니 바티스타 피라네시의 가장 잘 알려진 카프리치오 작품 '상상의 감옥'. 위키피디아 캡처

우리가 가장 쉽게 아는 드러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공간은 아마도 지하 공간일 것이다. 지하 공간을 묘사한 대표적인 미술 작품인 '상상의 감옥'은 18세기 이탈리아의 판화가이자 건축가인 조반니 바티스타 피라네시가 1745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연작이자 유럽 판화의 걸작이다. 이 작품은 로마 유적을 비롯한 고대 건축물들을 세밀하게 묘사한 카프리치오 양식으로 그려진 상상화로 다음 시대인 감상적 낭만주의와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와 같은 초현실주의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지하 대공간인 상상의 감옥은 이전에 볼 수 없었고 관심을 두지 않았던 도시의 하부공간을 신비하지만 모호하고 과장되며 역설적으로 그려냈다. 섬뜩하게 느껴지는 지하 공간이라도 다 감옥과 같은 공간은 아닐 것이다. 현대 도시와 건축은 고층뿐만 아니라 지하 공간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지상 레벨인 대지와 건축물과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고자 시도한다. 그 결과가 대지건축과 인공대지이다.

대지건축은 건축이 들어설 대지를 마치 종이처럼 자르고 접고 연결하는 접기 개념의 건축인데 이는 현대철학의 거장 들뢰즈의 주름이라는 개념에서부터 시작한다. 손으로 종이를 구기면 주름이 나타나고 구겨진 종이를 펴면 주름은 사라진다. 종이 속 주름은 주름이 점점 많아질수록 주름 사이의 공간인 내부와 외부 경계는 모호해지고 이 모호함은 명확한 경계에서 벗어나 나뉜 공간이 연속되면서 공간 전체를 하나로 만든다. 이 개념을 건축설계에 적용하면 대지와 건축이 마치 하나가 된 듯 일체화가 나타나고 건축공간에서 명확하게 구분하였던 바닥과 벽과 천장의 구분이 어려워진다. 건축에서 접기라는 위상학적 연산은 대지를 기울이거나 서로 다른 대지의 레벨을 연결하거나 건축물 내부 바닥판의 변형이나 지붕의 경사를 이용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다른 공간을 연결하여 분리되었던 공간의 연속성을 확보한다. 최근 현대건축은 2차원의 종이를 접어 새로운 3차원의 공간과 형태를 만드는 접기 연산에서 더 나아가 단위 유닛을 이용한 복잡계 건축과 함께 복합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대지와 건축의 새로운 대화

프랑스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가 설계한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 캠퍼스는 '땅의 건축'을 구현했다.

프랑스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가 설계한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 캠퍼스는 '땅의 건축'을 구현했다.

이화여자대학교 캠퍼스 정문 쪽에 있는 이화여자대학교 캠퍼스 복합단지(ECC)는 눈에 띄지 않아서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된 독특한 건축물이다. 2003년 ECC 계획 당시 오래된 캠퍼스 입구에 대형 규모의 건축이 부담이었는지 학교 측은 지하 건축을 주제로 국제건축공모전을 개최하고 프랑스의 대표 건축가인 도미니크 페로는 건축을 눈에 띄지 않게 땅 아래 묻는 파격적인 지하 공간을 제안했다. 그 결과 ECC는 건축이 땅속에 숨은 건축물이 됐다. 깊고 넓은 인공 계곡과 같은 공간만이 노출되니 사람들은 건축의 형태와 외관보다 오히려 공간과 건축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기존의 오래된 건축물이 복잡하게 산재해 있던 캠퍼스가 자연스럽게 개방적 공간으로 바뀌었다. 이화여대 정문에서부터 시작하는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걷다 보면 유리 건축물의 입면이 좌우 양쪽으로 나타난다. 외부에 노출된 부분은 건축물 중앙 부분의 옆쪽을 자르고 자른 부분을 그대로 아래 방향으로 내린 후 앞뒤로 연결된 것처럼 보이는 바닥판과 좌·우측 입면이다. 실제로 사용하는 공간은 지하 건축물 양쪽에 배치한 프로그램이며 중앙의 광장은 정문에서부터 학교 내부까지 하나로 연결되는 보행공간이다. 학교 정문에서부터 연속된 공간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건물 내부에 다다르게 된다. 이처럼 건축가는 입구에서 출구까지 끊어지지 않게 연결하는 접기 연산을 이용하여 기존에는 없는 새로운 공간의 유형을 만들어 냈다. 이곳은 지상의 대지 중앙 부분을 자르고 공간적 위치를 변화시키는 종이접기와 함께 앞쪽 입구와 뒤쪽 출구의 공간을 하나로 연결하는 위상학적 관통도 나타난다.

연속된 관계, 대지 건축

건축가 FOA의 설계작, 일본 요코하마 페리 터미널은 '대지 건축'의 전형적인 사례다.

건축가 FOA의 설계작, 일본 요코하마 페리 터미널은 '대지 건축'의 전형적인 사례다.

1994년 국제현상설계로 진행된 건축가 FOA(Foreign Office Architects)의 일본 요코하마 페리 터미널은 현대건축의 대표적 개념인 대지건축과 네트워크가 명확하게 표현된 현대건축의 전형과도 같은 작품이다. 요코하마역에서 항구를 따라 남쪽 바닷가로 계속 걸으면 항구쪽 개발지역을 지나 페리 터미널에 도착하게 된다. 페리 터미널의 첫인상은 항구의 언덕 위 너머에 있는 탁 트인 바다의 전망이다. 전망과 함께 눈에 들어오는 터미널의 풍경은 항구의 페리 터미널이라기보다 마치 인공으로 만든 낮은 언덕과도 같은 땅의 풍경인데 터미널 외부 전체를 감싸는 덱과 경사로는 언덕 위 천연 잔디 덕분에 건축물이라기보다는 자연처럼 느끼게 된다. 이곳이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공간적 특성은 터미널 입구에서부터 만들어진 목재 덱이 길의 이동 방향으로 끊어짐 없이 이어지는 연속성이다. 입구에서부터 시작한 인공 길이 중간에 입체적으로 바뀌어 일부분은 아래로 또 다른 부분은 위로 변한다. 연속된 길은 수직적인 위치가 바뀌면서 마치 종이접기와 같은 접힌 부분이 드러난다. 터미널 전체에 나타나는 접기 개념은 터미널의 인공대지에 종이에 주름을 만들 듯 연속되며 그 결과 공간은 복잡해지고 다양하게 나타난다. 종이와 같은 인공대지 중간 부분에 틈을 내서 벌리고 접어 주름들 사이 공간을 하나의 실 또는 프로그램으로 사용하고 내외부를 자연스럽게 동선으로 연결돼 네트워크 건축이 된다. 페리 터미널은 가위의 도움 없이 종이를 접어 형태를 만드는 방식만으로 완성된다. 이곳에는 언제 가도 좋지만, 특히 해 질 무렵이면 현대건축이 만든 인공 언덕에 앉아 노을과 함께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을 수 있는 낭만과 행복을 즐길 수 있다.

비우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터미널7 아키텍츠 건축사사무소가 설계한 서울도시건축전시관은 도시 속 보이드(빈 공간)의 좋은 예다.

터미널7 아키텍츠 건축사사무소가 설계한 서울도시건축전시관은 도시 속 보이드(빈 공간)의 좋은 예다.

종이접기와 같은 대지와 건축물의 경계가 없이 연속되는 건축은 지하나 지상의 다양한 공간을 활용하게 되면서 비움이라는 또 다른 건축을 만든다. 우리가 사는 도시는 대량생산과 과도한 소비로 유지되는 현대사회처럼 많은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주변을 살펴보면 높고 커다란 빌딩이 우후죽순으로 서 있다. 이렇게 도시가 개발로 확장하고 건물로 밀집하게 되면서 빈 공간은 거의 남겨 두지 않는다. 일반적인 건축물이 채워진 솔리드라면 도시 속 비워진 공간은 보이드이다. 도시에서 보이드는 보통 대지에서 수직으로 비워지기 때문에 형성된 공간이 독특하며 그렇기에 비움은 그냥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채움 이상의 역할이 요청된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건축물 윗부분을 과감하게 비워서 눈에 띄는 곳이 있다. 터미널 7 아키텍츠 건축사사무소가 설계한 서울시청 건너편에 있는 서울도시건축전시관은 서울마루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마치 우리 일상 속 평상과도 같은 낮은 지붕만 드러나는 건축물이다. 이곳은 보이드가 단순한 도시의 비워진 배경의 역할이 아니라 도시 내 비움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그 중요성이 강조된 곳임을 알 수 있다. 서울도시건축전시관의 지상부분인 1층 위 지붕에 서면 주변의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 그리고 전시관 길 건너 건널목에서는 지금까지 숨겨져 있던 아름다운 도시풍경과 그 풍경을 만드는 사람들의 삶이 그대로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고층 전망대와 달리 낮은 눈높이에서 가까이 보는 만큼 서울 도심의 주변 풍경 전체를 더 잘 볼 수 있다. 덕수궁 돌담을 걸으면서 옆쪽으로 막혀 있던 공간이 트여서 멀리 광화문까지 눈에 들어온다. 채우는 것보다 나를 비워서 다른 것의 가치를 알게 하는 것, 인생의 지혜를 깨닫게 하는 건축이다.

지어지지 않은 건축과 건축가

보이지 않는 건축은 현실로 완공된 건축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건축물이 우리의 눈앞에 나타나기까지는 기획, 설계, 허가, 시공 등 많은 단계의 과정을 거는데 그중 초기 설계과정을 담당하는 건축가의 노력이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최근 공공 건축 등 많은 건축설계안은 건축 현상설계 공모라는 과정을 거쳐 결정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건축 설계 공모는 공정함과 다양한 관점의 아이디어 제안이라는 장점으로 인해 수많은 건축가가 새로운 시대적 정당성과 자신만의 건축적 개념을 표현하고 주장할 좋은 기회이다. 그러나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런 과정의 문제점은 아마도 단 하나만의 건축설계 제안이 당선되고 현실화한다는 것이다. 당선된 건축가는 설계권을 확보하여 원하는 설계를 할 수 있지만, 나머지 수많은 제안자의 좋은 설계안은 폐기된다. 디자인 능력을 중심으로 가장 뛰어나고 완성도 있는 디자인을 선정하는 과정이라고 하지만 당선작이 모든 것을 다 담을 수 없으며 디자인은 시험처럼 점수화하고 등수로 평가하기 모호한 경우가 많다. 우리는 각 설계 안 속에 담긴 건축가의 노력과 그 가치를 다 파악하고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지어지지 못하는 수많은 제안 설계 속 숨어있는 가치를 찾아야 하며 이들의 보이지 않는 건축은 건축설계 과정에서 건축가의 땀으로 만들어 낸 노력의 결과로 존중해야 한다.

건축이라는 물리적 세계는 눈앞에 명확하게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건축, 지어지지 않는 건축 등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건축으로 구성된다. 이제 우리에게는 도시 속 드러나지 않은 그래서 눈에 띄지 않는 다양한 위상학적 개념의 건축, 그 속에 담긴 도시 속 삶의 공간과 장소의 의미, 하나의 건축을 구현하기 위한 건축가의 숨은 노력 등을 찾아낼 수 있는 심미안이 요청된다.


글·사진=정태종 단국대 건축학부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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