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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숨결 묻은 수건 한장 못 버려"... 엄마아빠의 시간은 멈췄다 [이태원 1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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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이 죽었는데... 88올림픽이 여전히 열리리라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소설가 박완서는 자식을 먼저 보낸 참척(慘慽)의 고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여기 작년 10월 29일 이태원에서 자식을 앞세우고 만 부모님들이 있습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상실감을 감내해야 했던 부모님들은 어떻게 1년을 버텨냈을까요? 자기 이름을 버리고 남은 인생을 'OO엄마'와 'OO아빠'로 살기로 결심한 이태원 참사 유족들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들었습니다.
"기자님 '그날' 사진 많이 갖고 계시죠? 이제 저희 애 얼굴 아시니까요, 한번만 다시 찾아봐 주세요."
4시간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엄마 임은주(49)씨가 힘겹게 입을 뗐다. 생면부지 남에게 참혹한 장면을 보이는 한이 있더라도, 딸아이가 맞은 '마지막 순간'을 소상히 확인하고 싶다는 엄마의 부탁이다. "원래 인터뷰도 안 하려고 했어요. 그래도 기사가 나가면 한 분이라도 알아보실까 해서… 아이 아빠가 딸애 모습을 찾겠다며 혼자 그날 영상을 수도 없이 돌려봐요."
스산한 가을비가 뿌리던 지난달 25일, 광주 지연이네는 여느 가정집처럼 방방마다 아이들 물건이 한가득이었다. 서랍 위 말린 꽃다발부터 방향제, 폴라로이드 사진기, 화장품과 향수, 립스틱 박스, 챙겨 먹다 남은 영양제까지. 큰딸 지연이가 어릴 때부터 독립 전까지 뒹굴던 5평짜리 방은 1년 전 그 모습 그대로였다. 마치 지연이가 저녁이 되면 문을 벌컥 열고 "엄마"를 외치며 돌아올 것처럼.
그러나 지연이는 이제 광주에도 서울에도 없다. "저희 부부에게 1년은 없었어요.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하고 싶지도, 기억나지도 않아요. 말 그대로 그날에 멈춰 있어요." 아빠 오영교(53)씨가 마른침을 삼켰다.
'용산구 이태원 해밀톤호텔 앞 긴급사고로 현재 교통통제 중'.
2022년 10월 29일 오후 11시 56분. 서울시가 발송한 안전안내문자에서 이태원 참사는 '긴급사고'로 불렸다. 그러나 결과는 159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최소 320명을 다치게 한 '대참사'였다. 인명피해는 우연이 아니었다. 그 숱한 사회적 재난과 이어진 수차례의 반성에도 사라지지 않고 힘을 응축한 세상의 총체적 부조리가, 이태원 좁은 골목에 똬리를 틀고 있다가 159명을 덮쳤다. 유족들은 왜 우리 아이가, 내 형제자매가 그날 그곳에서 그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야 했는지를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다. 빗속에서 사흘간 삼보일배를, 뙤약볕 159㎞ 행진을 하면서도, 여전히 2022년 10월 29일을 걷고 있는 지연이의 엄마 아빠처럼.
1999년 6월 28일 태어난 오지연은 끼 많은 아이였다. 중학교 3학년 때 연기 학원에 보냈더니 얼마 안 있어 소질을 보였다. "일주일 내내 학원을 갈 정도로 몰두했어요. 연기를 하며 현대무용도 접했죠." 배우로 성공하긴 쉽지 않다는 부모 걱정을 받아들여, 지난해 2월 은행 인턴으로 취직한 후로도 무대에 서겠다는 꿈은 늘 가슴 한편에 품고 있었단다.
그날. 지연이와 엄마의 마지막 통화는 오후 3시였다. 은행 정규직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친구와 이태원에 다녀오겠다는 말에 엄마는 "잘 다녀오라"고 말했다. 최종 면접 전날 광주에 내려오면 면접장에 데려다주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한밤중 벼락같이 뜬 속보와 함께 산산조각 났다.
'이태원 압사사고 추정. 심정지 환자 다수 발생'.
거긴 바로 지연이가 친구와 함께 다녀온다던 곳이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서울행 첫 열차를 탔다. 몇 번이나 통화를 시도했는지 모른다. 누군가 지연이 휴대폰을 받았다. 아이 행방은 모르고 전화기만 주웠다는 경찰관이었다. 기차에서 내려 찾아간 자취방에도 인기척은 없었다. 응급실이라도 돌아보자 결심한 찰나,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장례식장이란다. "갔더니 형사가 속옷과 양말이 담긴 지퍼백을 내밀어요. 제가 사준 거니까 알잖아요. 내 딸이구나."
세상이 무너졌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아빠는 회사를 그만뒀고, 엄마는 날마다 술에 입을 댔다. "매일 딸과 통화하던 저녁 6시가 되면 습관적으로 전화번호를 눌러요. 그러다 '맞다, 나 전화하면 안 되지' 해요." 언니의 빈자리가 시릴 둘째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공원을 돌다가도 또래만 보면 억장이 무너진다. 한동안 딸을 생각하면 예쁜 모습은 떠오르지 않고 영안실에서의 차가운 얼굴만 아른거려 가슴을 친 적도 여러 번이다.
그런데도 1년간 지연이의 죽음을 제대로 설명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지연이가 태어난 날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쁨으로 출생신고를 했던 아빠는, 딸이 언제 어디서 목숨을 잃었는지도 모른 채 사망신고를 했다. "100일 되면 방을 치우고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아직 못 지키고 있어요." 지연이를 찾으러 몸을 실었던 그 서울행 열차를, 엄마 아빠는 여전히 한 달에 두 번 넘게 타고 있다.
자식을 앞세운 고통은 세월을 더 산 노모라고 덜할 리 없다. 고 최재혁(47)씨의 어머니 김현숙씨는 그날 밤 수술을 받으러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아들 얘기를 듣고는 혼절하듯 서울로 올라왔다. 다친 발로 입석을 버티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도착하니 이미 빈소가 차려진 상태였어요."
재혁씨는 3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는 든든한 아들이었다. 대학원 시절 경영서적을 낼 정도로 트렌드에 밝았던 그는 생전에 IT, 컨설팅 등 여러 분야에서 일하다 마지막엔 JTBC 산하 콘텐츠 스튜디오 SLL 창립 멤버로 일했다. 30년 지기 송영재씨는 "친구들에겐 '재혁엄마'로 불릴 정도로 주변을 잘 챙겼다"면서 "그날도 전 직장 동료들과 모임이 있어 이태원을 찾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숙씨는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에 귀를 막는다. 기도로 슬픔을 달래지만, 아들의 죽음에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란 말도 도저히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그래서 엄마는 분향소에 간다. "아이들이 이태원에서 논 게 잘못인가요? 재혁이는 그날 오후 10시까지 살아서 사진을 찍었어요. '사망 시각'이라는 자정까지 왜 구하지 못한 거죠? 112신고는 왜 무시됐고, 재난문자는 왜 늦었는데요?"
진실을 알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서울광장 분향소를 지키는 건 유형우(53)씨도 마찬가지다. 참사로 4남매 중 둘째 딸 연주(21)를 잃은 유씨는 세 달 전 이태원참사유가족협의회에서 부운영위원장을 맡았다. "아내는 그날 얘기를 꺼내는 것도 힘들어해요. 제가 아빠로서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이 뭘까, 그건 '누명'을 벗겨주는 거다. 그래서 활동에 참여하게 됐어요."
그에게 분향소는 연주를 만나는 공간이다. 생활력이 강해 이른 아침부터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던 아이. 유달리 아빠를 잘 따르더니 대학 전공도 아빠의 옛 꿈을 좇아 컴퓨터공학으로 택한 아이. 그런 딸을 떠나보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한때는 집 안에 걸린 연주 사진을 다 치워 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분향소 영정 앞에서 딸과 대화를 나누는 게 일상이다.
아빠 곁을 지켜주는 건 여전히 연주다. 그의 손목엔 연주가 차고 다니던 묵주가 있다. "연주는 의협심이 강했던 아이예요.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건 누구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고, 장래희망은 사이버범죄 수사관이었죠. 살아 있었다면 분명 참사 책임자들을 향해 '사과하라'고 소리쳤을 거예요. 저 또한 시민분들의 기억 속에 잊히기 않기 위해, 진상규명을 위해 자리를 지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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