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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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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탄다. 출발 후 10여 분이 지나면 흘러나오는 안내방송. “이번 역은 이태원, 이태원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이태원’이라는 지명이 귀에 들어오면, 주위를 둘러본다.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고 싶다. 이 지명이 마음에 일으키는 파동을 나만 느끼는 게 아니었음 싶다. 눈을 마주친 누군가에게는 설핏, 웃음도 지어본다. 그러면 상대방도 희미한 미소를 보내오기 마련이다. 일터에 가느라 올라탄 지하철에서 1년째 멈춰지지 않는 나만의 의식이다.
다시 지하철을 탄다. 이번에는 출발 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다. “이번 역은 이태원, 이태원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집에 가는 길 지하철의 안내방송은 내리라는 재촉 같이 들린다. 내리고 싶다. 내리면 어디로 갈까. 2번 출구로 나가면 처음 책을 낼 때 함께 일했던 출판사 관계자들과 밥도 먹고 차도 마셨던 이국적인 음식점과 카페들이 아직도 있을까. 3번 출구로 나서서 걷다 보면 이슬람 사원을 지나 다큐멘터리 감독 친구가 얻었던 작업실에 도착했었지. 1번 출구로 나가 일단 해밀톤 호텔에서 어디로 갈지 결정했던 때는 20년 전쯤인가.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뒤엉킬 때쯤이면 어느새 이태원 역은 저만치 멀어져 있다.
나는 언제 이태원 역에서 내릴 수 있을까.
지역 도시에서 자라 1990년대에 서울로 온 나에게 처음 이태원은 낯설고 위험하지만 그마저도 매혹적으로 느껴지는 곳이었다. 미군 부대가 있는 동네에서 자랐기에 그와 비슷하겠거니 생각하고 처음 가 본 이태원은 차원이 다른 이국성으로 반짝이는, 한국 안의 외국이었다. 외국어로 된 책만 취급하는 널따란 서점. 어디서 왔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 다양한 생김새와 피부색의 사람들. 개성 강한 의류와 액세서리로 가득 찬 상점들. 그 무렵 친구들과 한 번씩 놀러 간 이태원에서 받았던 감각적 충격은 서울 시내 다른 동네에서 받았던 인상에 댈 게 아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무렵 이태원은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최고 전성기를 누렸던 쇼핑 상권이 쇠락하던 참이었다. 명품 ‘짝퉁’ 시장으로 유명했던 보세 상가들이 1990년대 집중 단속으로 발을 붙일 수 없게 되고 유흥업소들 또한 심야영업 금지로 영업을 할 수 없었다. 외국인을 상대로 한 성판매 업소들과 게이바들은 에이즈의 온상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1997년에는 한 햄버거 집에서 미군이 한국 남성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 한동안 흉흉한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이 사건은 이후 '이태원 살인사건'(홍기선 감독, 2009)이라는 영화로 제작되었다.) 그럼에도, 이태원은 화려했다.
나름대로 조심하느라 밤에는 가지 않았지만 한동안 해외를 다녀온 뒤로는 더 자주 이태원을 드나들게 됐다. 해외에 대한 일종의 향수를 달래는 데는 이태원만 한 곳이 없었다. 그럴듯하게 흉내만 낸 게 아닌 진짜배기 외국 음식들, 눈길이 부딪히면 가볍게 인사하고 스몰 토크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 나도 한 명의 ‘그냥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는 다양한 생김새와 피부색의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가 참 좋았다. 의무와 간섭과 경쟁으로 이 나라에서 좀 지치는 느낌이 들 때, 이태원에 다녀오면 잠시나마 해소가 되곤 했다.
2000년대 초반 무렵에는 젠더와 섹슈얼리티로 특정 공간을 살피는 학교 과제를 하느라 그동안 가 보지 못했던 구석구석을 살펴봤다. 이태원역 3번 출구 소방서 골목으로 올라가다 보면 나오는 후커힐과 게이바 그리고 트랜스젠더바 거리였다. 주로 백인 남성들에게 성 서비스를 파는 여러 국적의 여성들은 상상과는 다르게 외모도 나이도 다양했다. 그 무렵 ‘게이 힐’이라는 이름까지 얻은 게이바 거리의 클럽이나 바에 여성들이 들어가려면 남성들보다 더 비싼 입장료를 내야 했다. 업소 문틈 사이로 보이던 진한 화장의 트랜스젠더 여성들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같은 이태원이라고는 해도 1번 출구 동네와 3번 출구 동네는 반짝거림의 성분이 달랐다고 해야 할까. 3번 출구 동네를 드나들면서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계급이 교차하는 방식을 함께 살피지 않으면 삶에서 멀어진 이야기만 하게 된다는 걸 배웠다. 그래도 이태원은, 이 모든 ‘한국적이지 않은 것’을 품은, 내가 아는 한 유일한 곳이었다.
고려 말부터 귀화한 거란족과 여진족들이 집단 정착하여 작물을 재배했던 곳.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강간당한 여성들과 그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정착하여 살아왔던 곳. 지명의 유래 중 하나는 이태원이 단일민족국가의 믿음이 뿌리 깊은 이 나라에서, 이민족과 이민족의 아이를 낳아 기른 여성과 그 아이들이 정착해 살아온 매우 드문 곳임을 보여준다.
한편 한국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이태원의 기지촌은 1970, 80년대 전성기를 누렸는데 이 때문에 1990년대까지도 이 지역은 한국인 그중에서도 한국 여성들에게 ‘위험한’ 곳으로 간주되었다. 이 인식은 복잡하고 분열적인 것이었다. 외국 군인-남성에게 ‘우리’의 여성을 ‘빼앗겼다’는 박탈감과 열등감, ‘우리’는 열심히 일하는데 외국 남성과 ‘놀아나는’ 여성들에 대한 분노와 경멸, ‘보통 한국’ 여성들도 기지촌 여성들처럼 되면 어쩌나 싶은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 10여 년 전, 친구의 이태원 다큐멘터리 작업을 거들 때 만났던 미군 클럽 여자 사장님은 자신을 ‘양갈보’라고 욕하면서도 알뜰히 이용한 한국 남자들에 대한 온갖 일화를 들려주셨다. 오랫동안 기지촌에서 일했던 ‘언니들’은 성판매뿐 아니라 온갖 저임금의 일자리를 전전하며 가족과 타인의 생계를 꾸려온 이들이었다. 밖에서는 양갈보라고 손가락질당했지만 이태원 안에서는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고 말한 한 언니의 이야기가 특히 인상 깊었다. (강유가람 감독의 2016년작 '이태원'이 이 다큐멘터리이다.)
2000년대 후반부터 이방성이 매력적인 관광 문화 자원이 되면서 이 오랜 이방의 공간이 한국 사회로 통합되는 듯했다. 그러나 낙인은 통합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낙인을 지닌 자들은 불안정하게 통합되고 쉽게 배제당한다. 애초 통합의 기준 자체가 낙인찍은 자들의 기준이기에 그렇다. 낙인찍힌 공간도 마찬가지다. 2019년 이태원 지역의 코로나 확산 진원지로 게이 클럽과 바가 지목되면서 이 지역 전체가 ‘방역 강국 한국’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골칫덩이로 여겨졌다. 1년 전에는 코로나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쁨에 한바탕 축제에 동참한 이들 중 159명이 서 있다가 사망했는데도 ‘놀러 갔다 죽은, 철없는 사람들’로 매도하고 혐오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혐오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태원 참사 생존자 김초롱씨는 최근 출판한 '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에서 이렇게 썼다.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생존자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그때 나에게 왜 백화점에 갔냐는 사람은 없었다’라고.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정말, 이게 무슨 말일까? 나는 이태원 참사 생존자들에게 유독 퍼부어진 ‘왜 거기 갔냐’는 질책이 지난 30년간 한국 사회의 변화와 변화하지 않음을 동시에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우선 변화부터. 한국 사회는 사회적인 재난의 책임을 재난의 피해자 개인에게 돌리는 극도의 각자도생 사회가 되었다. 삼풍백화점 참사 때는 대통령이 사과하고 책임자를 경질했다. 언론은 대책 마련을 촉구했고 이를 통해 시민들이 대안 논의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태원 참사에서는 이 중 어느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이방성을 뿌리에 두고 다양성을 포용해 왔던 한 공간에 대한 낙인, 그 낙인의 오랜 기억에 의지해 모욕을 일삼는 습성은 그대로다. 변화와 변화하지 않음 모두 뼈아프다.
김초롱씨의 책을 읽고 나의 이태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이태원에서 너무 내리고 싶은데 내리지 못하는 일상을 나누고 싶어졌다. 개인을, 공간을, 낙인찍어 불안정한 경계 위에 놓고 언제든 배제하려는 단일한 힘을 해체하려면,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백 개의 이야기, 천 개의 이야기, 그리하여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이야기들이 말해져야 하므로. 한국에서만 시청할 수 없다는 이태원 참사 다큐멘터리 '크러쉬'를 포함하여 다른 이들의 이태원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10월의 마지막 날에는 이태원에서 내려야겠다.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인 이한 작가와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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