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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증금으로 '건물쇼핑'한 임대인 정씨… 부루마블 하듯 부동산 제국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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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전세사기 사건이 수원에서 또 터졌습니다. 확인된 피해규모만 671세대(세입자)입니다. '정씨'라는 임대인이 수십 채 건물을 보유하며, 수백 건 임대차 계약을 맺으며 수백억 대 전세보증금을 긁어모았습니다. 정씨는 어떻게 이런 '부동산 제국'을 구축할 수 있었을까요? 정씨의 정체를 추적하고, 사기가 근절되지 않는 전세제도의 맹점을 짚어봤습니다.
저는 잠적하지 않았습니다. 보상 계획은 차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17일 오후 경기 수원시의 한 다세대주택 앞. 백발의 중년 남성이 자신을 둘러싼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이 바로 '수원 전세사기' 사태 주범으로 지목된 임대인 정모(59)씨다. 그는 이날 경찰 압수수색에 참관한 뒤 택시를 불러 현장을 떠나려다가 피해자들에게 붙잡혔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정씨는 8월쯤부터 임대차보증금을 돌려달라는 임차인들의 연락을 받지 않고 잠적한 상태라고 한다.
671세대(대책위원회 집계)라는 대규모 피해자를 양산한 수원 전세사기 의혹의 정점. 임대인 정씨의 실체에 대해선 명확하게 밝혀진 부분이 없다. 기자들 앞에 등장한 정씨의 허름한 행색은 '수백억 대 부동산 자산가'라는 세간의 평과 거리가 있어 보였다. 그는 어떻게 수원 부동산 시장의 큰손이 될 수 있었을까. 소문만 무성했던 정씨의 정체를 파헤치고 그가 이 지역에서 부를 일군 수법을 확인하기 위해, 한국일보는 정씨와 그 일가의 '부동산 치부' 과정을 상세히 추적했다.
본보가 정씨 측근과 지인, 수원시 일대 공인중개사 등을 통해 취재한 내용을 종합하면, 그는 2000년대 서울 용산에서 10년 동안 전자제품을 판매하면서 돈을 벌었고 그 종잣돈을 들고 수원으로 와 인계동의 7층짜리 다세대주택을 매입했다고 한다. '수원 임대왕'의 시작을 알리는 계약이었다.
정씨는 이후 이른바 무자본 갭투자(자기자본 투입 없이 전세보증금을 이용해 주택을 구매) 방식으로 많은 근저당을 낀 채 '건물 쇼핑'에 나섰다. 관련 계약서와 등기부등본 분석 결과, 그는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건물 매입을 늘린 것으로 보이는데, 2018년 한 해 사들인 건물이 확인된 것만 10채에 이른다. 2020년에 이르러 정씨 일가는 법인을 세운 뒤 직접 건축업자를 끼고 건물을 세우기까지 했다. 이렇게 확인된 정씨 일가 소유 건물만 수원·화성시에서 40채 이상이다.
정씨는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받아 다른 건물을 사는 방식을 거듭하며, 차츰 자기 소유의 부동산을 늘려갔다. 이 과정에서 정씨는 유동성을 빠르게 늘리기 위해 월세 대신 주로 전세로 집을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그는 여기저기 비서와 측근들을 보내 위임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는데, '공장에서 찍어내기' 식으로 많은 임대차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보인다. 다수 피해자들은 "계약 당시 정씨가 아니라 직원들이 도장을 갖고와서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건물을 대량으로 매입하는 과정에서 정씨는 자신의 부동산 제국을 만들기 위해 친인척과 측근을 모두 동원했다. 총 세 곳의 중개소가 정씨 소유 건물들의 중개를 담당한 것으로 파악됐는데, 이 중개소는 ①정씨 아들 ②정씨의 개인 비서 ③아내 김모(53)씨의 오빠가 각각 대표로 기재됐다. 해당 중개소들은 모두 올해 하반기부터 문을 닫았거나 간판을 내린 폐업 상태다.
'건물 부자'가 된 정씨는 부동산 외 각종 사업에도 손을 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수원에 햄버거 가게, 베이커리, 카페를 내며 사업을 확장했다. 그러면서 부동산 매입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경기 양평군, 강원 강릉시, 제주에서도 부지와 건물을 매입하는 등 공격적인 부동산 투자를 이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정씨는 재산을 불리려는 목적보다 그냥 재밌어서 계속 건물 사고 팔고 하는 거예요. 게임 중독 같아요.
(정씨를 아는 지인 A씨의 증언)
지인 A씨는 정씨를 '온라인 게임광'으로 기억했다. A씨에 따르면 정씨는 돈을 번 뒤부터 수 천 만원 하는 온라인 게임 아이템을 구매하기도 했다고 한다. 게임 유튜버를 데리고 와 게임 아이템 장사를 하라고 앉혀 놓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정씨는 외모를 꾸미는 데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고급 수입차에 큰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정씨를 실제 본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단벌신사 차림의 평범한 동네 아저씨였다"면서도 "랜드로버나 마세라티 등 외제차를 끌고 다녔다"고 증언했다.
정씨가 이끄는 부동산 조직은 크게 △건물관리팀 △카페팀 △사무실팀 등 3개로 이뤄졌다. 수리 인부 등 남성 4명으로 이뤄진 건물관리팀은 정씨 소유 건물의 하자 보수와 시설 관리 등을 담당하고, 카페팀은 정씨가 운영하는 카페 관리를 맡았다. 핵심인 사무실팀에는 정씨 아들과 그의 예비 며느리가 있었고, 이 외에도 임차인과의 계약을 주로 담당한 정씨의 개인 비서 정모 부장, 오모 팀장, 장모 실장, 아내 김씨의 조카 차모씨 등 6명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정씨 아들과 예비 며느리는 부동산 관련 전문 인력으로 일가 임대업의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 정씨 아들은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감정평가사로 일하다, 올해 초 정씨 사업에 합류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씨 아들의 예비 배우자는 노무·회계 관련 일을 전담하며 올해 7월부터 사무실팀에 투입되는 등 핵심 업무를 맡았다. 정씨의 한 지인은 "정씨 부부가 예비 며느리에게 '부동산 자격증을 따와야 아들과 결혼을 허락하겠다'는 말도 했다"고 전했다.
그렇게 영원할 것 같았던 '부동산 제국 프로젝트'는 갑자기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작년부터 종합부동산세와 지방세 부담이 커지면서, 정씨의 자금줄이 조금씩 마르기 시작했다. 세입자도 예전처럼 많이 모으기 힘들어졌고, 전세시장이 부진해지자 현금 유동성도 나빠졌다. 결국 올해 7월 지방세 체납으로 가압류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수원 전세사기' 사태가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주변인들은 정씨가 자금난 탓에 올해 초부터 사업을 정리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수원의 한 공인중개사는 "작년부터 은행권에서 정씨 신용이 안 좋다는 얘기가 들려왔다"며 "이 지역 오래된 부동산들은 언젠가 일이 터질 것 같아서 정씨 건물은 취급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정씨도 6월쯤부터는 사태가 터질 것을 알고 대비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정씨는 이 무렵 한 직원에게 "5년만 감방 살다 오면 된다"면서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단다. 그러나 그는 8월쯤 잠적해 최근 압수수색 때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기자들 앞에서 "숨지 않았다"고 항변했다.
정씨 일가가 연루된 전세사기 피해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경기남부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는 22일까지 정씨 일가를 사기 혐의로 처벌해달라는 고소장이 290건 접수됐다고 밝혔다. 고소장에 적힌 피해 액수 합계는 425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수원 전세사기 의혹이 일파만파로 번지면서, 이 일대 부동산 시장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수원 지역에서 임대업을 하는 노모(57)씨는 "사태가 터지고 나서, 세입자들이 계약 만료 이전임에도 방을 빼고 나간다는 문의가 늘었다"며 "금리도 올랐는데 전세사기가 터져 정상적으로 임대사업하는 사람들은 요새 죽을 맛이다"며 싸늘한 분위기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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