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 여성 참정권과 흑인 참정권이 충돌하던 시절

입력
2023.10.23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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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3 전미여성인권대회

페미니즘 운동이 백인 여성뿐 아니라 흑인 여성(남성)들의 참정권까지 포괄해야 한다고 주장한 루시 스톤.

페미니즘 운동이 백인 여성뿐 아니라 흑인 여성(남성)들의 참정권까지 포괄해야 한다고 주장한 루시 스톤.

“(미국) 여성의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거대한 운동”의 첫걸음으로 평가되는 ‘세네카폴스 여성대회(1848)’에서 참가자 100명(남성 32명 포함)이 저 유명한 ‘감정선언문’에 서명했다. “적잖은 오해와 거짓, 조롱이 앞길을 가로막겠지만, 우리는 위대한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역량을 동원할 것이다.”

그 결의에 따른 첫 행사인 ‘전국여성인권대회’가 1850년 10월 23일 매사추세츠주 우스터에서, 11개주 1,000여 명의 대표단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상설 조직 출범과 강령, 대중운동 확산 방안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기 위한 행사였다. 주최 측인 노예제반대협회 회원들은 연사들의 발언을 녹취, 팸플릿 등으로 미국 전역에 배포했다. 연사 중 한 명인 루시 스톤(Lucy Stone)은 “우리는 여성들이 각자의 본성과 여성성을 발전시켜야 하며, 죽어 묘비에 누구의 미망인으로 기록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대회는 1869년 제12차 워싱턴D.C. 대회까지 이어지다 흑인 남성 참정권에 대한 입장 차이로 분열됐다. 세네카폴스 대회 주역인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과 수전 앤서니는 수정헌법 14, 15조에 반대하며 여성 참정권 등 여성 평등권이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전국여성참정권협회(NWSA)’를 설립했다. 반면에 루시 스톤 등은 흑인을 포함한 보편 참정권을 주장했다. 다만 참정권 외 여성의 사회-경제적 권리는 차후의 과제로 배제했다. 그들은 ‘미국여성참정권협회(AWSA)’를 만들었다. 두 단체는 1890년에야 ‘전미여성참정권협회(NAWSA)’로 통합됐지만, 이후로도 일부 지역에서는 흑인 여성을 배제하며 흑백분리 행사를 고집하기도 했다.
성소수자 등에 대한 이견으로 분열-대립하고 있는 근년의 한국 페미니즘 운동도 조만간 구불구불 이어진 역사의 길 위에서 하나로 만나게 될 것이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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