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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외교관 '서희'가 지금 있었다면

입력
2023.10.15 22:00
26면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지난 11일 '김정은 총비서가 지난달 12일부터 17일까지 러시아를 방문한 것을 기념해 국가우표발행국에서 새 우표(소형전지 2종·묶음전지 2종·개별우표 1종)를 제작했다'고 보도했다. 우표에는 "조로(북러)관계 발전의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한 사변적 계기"라는 문구가 담겼다. 뉴스1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지난 11일 '김정은 총비서가 지난달 12일부터 17일까지 러시아를 방문한 것을 기념해 국가우표발행국에서 새 우표(소형전지 2종·묶음전지 2종·개별우표 1종)를 제작했다'고 보도했다. 우표에는 "조로(북러)관계 발전의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한 사변적 계기"라는 문구가 담겼다. 뉴스1

지난달 북·러 정상회담 성사 후 양국이 밀착하는 모습을 보이자, 한ㆍ미ㆍ일 대 북ㆍ중ㆍ러 신냉전 구조가 강화될 수 있다는 우려의 소리가 나온다. 신냉전 구조가 강화되면 한ㆍ미ㆍ일 연대를 바탕으로 북한을 압박함으로써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고 개혁과 개방의 길로 나오도록 견인한다는 우리의 한반도 전략의 큰 틀이 헝클어질 뿐 아니라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이 높아진다.

이런 신냉전 구조의 고착을 막으려면 적극적ㆍ전략적 외교 노력이 필요한데 우리 외교 역량을 평가하는 국민의 시선엔 왠지 미덥지 않다는 느낌이 묻어난다. 나아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지낸 위성락 전 러시아 대사는 한국 외교 생태계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자기중심적·감정적 관점 △국내 정치에 종속 △이념성과 당파성 △포퓰리즘 △아마추어리즘을 한국 외교의 5대 수렁으로 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외교의 커다란 성공 사례를 이끈 한 인물이 떠오른다. 우리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외교관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많은 이들이 이 인물을 꼽을 것 같다. 993년 거란의 고려 침공 시 협상을 통해 강동 6주를 획득하고 전쟁을 종결한 서희(942~998년)가 바로 그 인물이다. 서희는 국사 교과서는 물론 국어 교과서에도 협상 단원의 소재로 다룰 만큼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서희의 협상은 ‘세 치 혀로 강동 6주를 획득했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고 그 배경과 과정, 영향과 의미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서희의 협상 승리는 세 치 혀(말 잘함, 임기응변) 때문이기보다는 당시 동아시아 국제정세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바탕으로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고 전략적 사고를 한 결과다. 당시 동아시아는 중원을 놓고 2대 강대국인 송과 거란이 남북으로 대치 중인 상태에서, 동에는 고려가 자리 잡고, 고려와 거란 사이에 여진족이 거주하는 형국이었다. 그런데, 거란은 송과 대치 중이라 고려와의 전쟁에 전념할 수 없는 전략적 약점이 있었고 실제 전투에서도 침공한 거란군은 계속 진군하지 않고 항복만 강요했다. 여기서 서희가 거란의 침공 목적이 고려 정벌이 아니라 고려와 송의 단교임을 간파하고 이를 협상에 이용하여 강동 6주를 획득한 것이다.

또 눈에 띄는 것은 강동 6주 획득에 송과 단교하고 거란에 사대(事大)의 예를 갖추는 반대급부가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사대 제도는 동아시아 국제정치질서의 근간으로 고려로서는 송과 거란 중 양자택일이 있을 뿐 사대 제도 자체를 피하기는 어려웠다. 고려가 거란에 사대의 예를 갖추고 전략적 요충지인 강동 6주를 취한 것은 명분을 넘겨주고 실리를 얻은 실용 외교였다는 것이 대다수 연구자의 평가이다. 그 외에도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주장하여 거란의 인정을 받아냄으로써 중국의 동북공정을 반박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점 등 서희 협상의 장점과 성과는 매우 많다.

외교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는 이 시대에 한국 외교의 5대 수렁을 단단한 대지로, 통일로 가는 탄탄대로로 만들 서희 같은 인물을 고대하게 된다. 한편 한국 외교의 5대 수렁은 한국 정치·사회의 5대 수렁이기도 하다. 한 세기 전 실패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외교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전반에 대각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우재욱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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