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입력
2023.10.13 17:0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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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구 선거, 민심 변화 속도 놀라워
양당 이탈한 스윙보터 존재감 뚜렷
이념·진영 정체성보다 실리·공정 중요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다음 날인 12일 서울 강서구 가양역사거리에 걸려 있던 선거 현수막이 철거되고 있다. 이한호 기자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다음 날인 12일 서울 강서구 가양역사거리에 걸려 있던 선거 현수막이 철거되고 있다. 이한호 기자


11일 치러진 강서구청장 보궐 선거 결과가 나오자, 국민의힘에서 이 지역이 민주당 텃밭이었다는 소리가 나온다. 김기현 대표는 “어려운 험지였다”고 했고, 어떤 방송 패널은 17.15%포인트 격차가 그렇게 큰 차이는 아니라고도 했다. 원래 그런 곳이니 이번 선거 참패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자기 위로다.

강서구청장의 경우 14~16대(2010~22년)를 민주당계열 정당이 차지해 얼핏 보면 이런 위안이 영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11대~13대(2002년~10년)는 국민의힘 계열인 한나라당이 구청장을 내리 배출해 거의 10년 주기로 유권자 지형이 서서히 바뀌었던 곳이라 볼 수 있다.

놀라운 것은 최근 3년간의 변화 속도다. 이 지역에서 2020년 4월 총선 당시엔 더불어민주당이 17%포인트 앞섰지만, 1년 뒤인 2021년 4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선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53.9%)가 박영선 민주당 후보(42.5%)를 11%포인트나 앞섰다. 이듬해 3월 대선과 6월 지방선거에선 두 당이 2~3%포인트 차이로 접전을 벌이다가 이번 선거에선 민주당 후보가 압승을 거뒀다. 1년 간격으로 벌어진 선거마다 아찔할 정도로 양당의 지지율이 요동쳤다.

대체로 한번 형성된 개인의 정치적 성향은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에 한 정당이 권력을 잡으면 한동안 주도권을 갖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젠 이 우위를 1, 2년도 보장할 수 없게 됐다. 보궐선거가 치러지면서 민주당이 국민의힘에 내줬던 지방 권력을 불과 1년 만에 되찾은 것이다. 이런 현상이 강서구에서만 별나게 벌어진 게 아니다. 지난 대선에서 ‘대통령 교체 10년 주기’가 깨졌던 것으로 서울의 다른 지역들도 이런 흐름을 따랐다. 박근혜 탄핵, 문재인 정부 출범과 윤석열 정부 등장까지 민심은 빠르고 거침없고 단호했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주목하고 싶은 것은 양당에 밀착되지 않고 그때그때 표심을 바꾸는 유권자, 이른바 ‘스윙보터’다. 이들은 박근혜 탄핵 이후 등장한 탈보수층, 문재인 정부 실정에 따른 탈민주당층 등 여러 이름을 바꿔 달면서 주요 선거에서 존재감을 뚜렷하게 드러냈다. 과거에 무당파라고 하면 선거에 무관심한 층으로 인식되기 일쑤여서 선거 운동은 지지층 결집 전략으로 흐르기 마련이었다. 윤석열 대통령도 최근까지 행보를 보면 이념 구도를 강조하며 보수층 결집에 사활을 걸다시피 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양당에서 이탈한 무당파들은 보수나 진보 정체성, 이념에 구애받지 않는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민감하고 그럴수록 공정한 게임의 룰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가 이런 스윙보터의 주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선거에 무관심한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표심을 행사하며 “내가 언제 네 편이었냐”며 가차 없이 회초리를 든다. ‘미워도 다시 한번’ 따위는 없다.

통상 집권 초기에 치러지는 선거는 여당에 유리하고 집권 후반기에 심판론이 등장하지만 이것도 옛말이 되는 것 같다. 권력 교체 주기가 빨라지면서 윤석열 정부 심판론도 벌써 등장하고 있다. 내년 총선이 집권 전반기에 해당돼 여당에 유리할 것이란 통념은 애당초 접는 게 낫다. 심판의 주기에도 속도가 붙었기 때문이다.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이번 선거에 낙관해 의회권력을 오만하게 휘두르다간 언제 불똥을 맞을지 모른다.

이런 민심의 속도는 당연히 SNS 등 미디어의 발달 덕분일 터다. 그러나 우리가 인식하고 포착하지 못했을 뿐 민심이란 원래부터 그랬던 것일지 모르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김수영의 시처럼 말이다.

송용창 뉴스1부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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