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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문인들의 추천시로 만나는, '불가능에게로' 향한 시인 故 허수경

입력
2023.10.14 04:30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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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주기 맞아 발간된 허수경 시선집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후배 시인 56명이 직접 고른 83편과 '추천의 말'

동서문학상, 전숙희문학상, 이육사문학상을 수상한 고 허수경 시인은 시집 외에도 다양한 장르의 글을 썼다. 산문집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등과 장편소설 '모래도시' '박하' 등을 펴냈고, '슬픈 란돌린' '끝없는 이야기' 등의 번역을 맡기도 했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동서문학상, 전숙희문학상, 이육사문학상을 수상한 고 허수경 시인은 시집 외에도 다양한 장르의 글을 썼다. 산문집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등과 장편소설 '모래도시' '박하' 등을 펴냈고, '슬픈 란돌린' '끝없는 이야기' 등의 번역을 맡기도 했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한 사람의 시간이 그치고 남겨진 것은 이상할 만큼 우리다. 우리는 놀라울 만큼 가볍게 우리로 묶인다. (중략) 우리는 연약한 세계 단위가 된 것 같다. (중략) 또 다른 세계로 떠난 시인의 첫 시집을 펼치면서 나는 그리운 미래감(感)의 흔적을 살핀다."

시선집은 평전과 같다. 시를 통해 시인의 생애를 돌아보고, 자연스레 그 시도 새로 읽는다. 고 허수경(1964~2018) 시인 5주기에 맞춰 출간된 시선집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도 그렇다. 한 편 한 편 따라가다 보면 떠난 이가 남긴 세계가 전과는 다른, 전보다 진한 향을 뿜어낸다. 그래서 반갑다. 56명의 젊은 시인이 직접 고른 83편의 시 전문과 그에 대한 추천 글을 함께 엮어 책의 온기를 더한다. 안미린 시인의 '추천의 말'을 빌리자면, 시선집은 허수경의 시간이 그치고 묶인 '우리'와의 만남이다.

1987년 등단한 허수경은 이듬해 첫 시집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를 내고, 두 번째 시집 '혼자 가는 먼 집'(1992)으로 시단에 이름 석 자를 또렷하게 새겼다. 1992년 독일로 떠나 뮌스터대에서 고고학을 전공, 연구하면서 작품세계는 깊어진다. 고고학적 상상력, 약 26년간 이국의 삶 속에서 모국어로 시를 쓰며 보여준 독특한 언어 감각 등이 두드러진다. "우리 삶의 무뎌진 실감과 통각을 회복시킨다"(이설빈 시인)고도 그의 시를 표현한다. 위암으로 투병하던 시인은 "앞으로의 소망이 있다면 젊은 시인들과 젊은 노점상들과 젊은 노동자들에게 아부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다,라는 말을 뒤로"(문학동네시인선 인용) 남긴 채 쉰넷의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허수경 지음·문학과지성사 발행·316쪽·1만7,000원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허수경 지음·문학과지성사 발행·316쪽·1만7,000원

시선집은 총 6권의 시집 발간순으로 정리됐다. 31년의 시력을 한데 모아 읽으니 고고학자로서 터키로, 시리아로 발굴 작업을 하며 시를 쓴 시인의 특징이 더 또렷해진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이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했다. 물질이든 생명이든 유한한 주기를 살다가 사라져갈 때 그들의 영혼은 어디인가에 남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산문집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에서 그는 폐허 도시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런 상실, 소멸, 시간에 대한 단상이 작품에 묻어난다. 예컨대 표제작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는 평행 우주에 살고 있는 무수한 '나들'을 소환하면서 우리 안의 경계를 허문다.

발굴 현장에서 전쟁과 살육을 목도한 시인은 기어코 사랑을 말한다. 누에가 당한 폭력을 생각하며 비단시장에 눈물을 흘릴 시인(수록시 '삶이 죽음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그때처럼')을 그리면서도 멸망의 시간이 오면 "인류! / 사랑해 / 울지 마! 하고" 마지막 연설을 하길 바란다.

세월의 흐름에 따른 변화도 엿보인다. 고향의 이미지가 대표적이다. 경남 진주에서 나고 자라 등단 전후로 서울살이를 하고 이후 독일에서 계속 살아간 시인에게 고향은 주요한 소재다. 초기에는 향토성이 짙게 배어 있는 시들을 선보였고 시 '먹고 싶다······'처럼 서울살이를 노래하기도 한다. 독일로 건너간 뒤 시인의 고향은 추상적으로 변한다. 그러면서 고독함과 외로움의 감정도 승화하는 듯하다. 마지막 시집 수록작인 '이국의 호텔'은 낯선 공간을 끊임없이 오가는 이방인으로서 사는 모든 이에게 고독한 순간 "고단한 날들 너머의 작은 우울을 기꺼이 껴안아볼 수 있을 것"(주민현 시인) 같은 용기를 준다.

고고학 연구를 하고 장편소설을 집필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한 허수경 시인은 "내가 무엇을 하든 결국은 시로 가기 위한 길일 거야"(세 번째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라고 선언했다. 시를 향한 그 절절함에 매료돼 50명이 넘는 후배 문인이 시선집 발간에 참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고고학 연구를 하고 장편소설을 집필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한 허수경 시인은 "내가 무엇을 하든 결국은 시로 가기 위한 길일 거야"(세 번째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라고 선언했다. 시를 향한 그 절절함에 매료돼 50명이 넘는 후배 문인이 시선집 발간에 참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중복 추천된 시도 있다. 그런 경우 한 작품 뒤에 여러 추천인의 글이 이어져 각기 다른 시각을 엿보는 재미를 더한다. 가령 시 '달빛'을 고른 김연덕 시인은 "빛나는 찰나를 위해 감수해야만 하는 암흑 같은 시간들"에 집중한다. 그런가 하면 백은선 시인은 같은 시를 읽고 "영혼의 시차에 멀미를 느끼며 흔들리는 한 그루 나무. 달빛 아래 떠오르는 나무"를 생각한다.

"차창 너머로 보랏빛 시집 제목이 보였다. 내 목적지인 것 같았다." 마지막 시집이 된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2016)의 뒤표지 글이다. 시인은 어느 기차역에서 노숙자의 낡은 시집 제목 '불가능에게로'를 훔쳐보고 이렇게 말한다. 압도적인 시간의 힘 아래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불가능하기에 그립고 쓸쓸하며 아리고 때론 허기지다. 그럼에도 '불가능에게로' 향하며 부른 허수경 시인의 노래는 '우리' 곁에 남아 있다. 담백하고 따스하게.

진달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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