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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남자, 머무르는 여자, 이동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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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국립중앙박물관은 소장하고 있던 신사임당 작품들을 전시하는 특별전을 열었다. 새롭게 발행하기로 한 오만 원권 지폐의 얼굴을 둘러싸고 여러 이야기들이 나오던 참이었다. 아마도 오만 원권의 새로운 얼굴인 신사임당에 대한 재조명 차원에서 기획된 전시회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 전시회에서 나는 신사임당이 그렸다는 산수화 두 점을 처음 보았다. 1980년대에 여중과 여고를 다녔기에 현모양처로서의 신사임당에 대해서는 질리도록 들어온 터였다. 더불어 그림솜씨도 뛰어났다는 일화가 따라붙기는 했지만 그런 일화는 집 안에서 그릴 수 있는 여러 생물과 사물을 소일거리 삼아 그린 신사임당의 부지런함에 대한 것이었지 화가로서의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유교 원리에 따르면 여성 특히 양반가의 여성들은 집 ‘안’에 머물러야 하는 이들이었다. 그림은 여성들에게 장려된 활동이 아니었지만, 그나마 집 안에서 볼 수 있는 사물을 그린 그림은 여성의 경계를 넘지는 않은 것으로 정당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연유에서 ‘초충도’, 즉 풀과 벌레들을 그린 그림들이 신사임당의 대표작으로 알려졌으리라.
흥미롭게도 사임당은 살아생전에 산수도를 잘 그린 화가로서 유명했다고 한다. ‘이곡산수병’이라 이름 붙은 신사임당의 산수화들은 그녀의 명성을 짐작게 한다. 당시 그녀는 현모양처 신사임당이 아닌, 화가 신씨로 알려져 있었다.
그녀의 사후 100여 년이 지난 17세기 중엽부터 이런 평가는 바뀌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 유학자 송시열이 주도한 이 평가에서 사임당은 대유학자 율곡 이이를 낳을 만한 부덕(婦德)을 그림으로도 표현한 이로 자리매김되었다. 송시열은 그녀가 남긴 포도나 난초 그림은 높이 평가했지만 산수화에 대해서는 박한 소리를 늘어놓는다. 이후 남성 유학자들은 송시열의 평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신사임당의 산수화는 잊히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오만 원권에는 초충도가 신사임당 옆에 새겨져, 대한민국 화폐 최초로 얼굴을 남긴 여성의 ‘자격’을 분명히 보여준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 능력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지정한 여성의 ‘자리’를 넘지 않는, 혹은 넘지 않는다고 해석될 수 있는 여성. 경계를 알고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에 집중하는 여성.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머무르는 존재이지 이동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동은 남성의 특권이었다. 그러므로 상상 속의 풍경을 그린다고 하더라도 이동하는 시선-주체를 상정하는 산수화는 여성의 경계를 넘는 것이었다.
이동하는 자를 남성으로, 머무르는 자를 여성으로 보는 것은 한국 역사에서만 유난한 젠더관일까? 그렇지 않다. 인류 역사에서 길 떠남과 모험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하고 성숙한 인간이 되는 과정을 그린 수많은 이야기들은 대부분 남성이 주인공이다. 고대 그리스의 '오디세이아', 아랍 문화의 정수가 담긴 '천일야화', 근대 백인 남성 주체의 탄생을 보여준 '로빈슨 크루소', 미국 문화를 성찰적으로 그린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 등 세계를 이동하는 이들은 남성이었다. 반면 여성들은 남성 주인공을 불러 세워 고난을 겪게 하거나 고향에서 기다리는 자들이었다.
서구에서도 스스로의 힘으로 이동하려고 한 여성들은 자신의 자리를 이탈한 자들로 여겨졌다. 근대의 도래라는 격변 속에서 등장한 신여성(New Woman)들이 특히 그러한 존재들이었다. 19세기 말 영국에서 등장한 신여성들은 당시 새로운 이동수단으로 부상한 자전거를 선호했다. 전 시대보다 훨씬 활동적인 의상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도시를 활보하는 신여성들에 대해 당시 언론은 “독신이며 교육을 받았고 여성권리에 대해 강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여자들로 논평한다. 자전거는 다른 동력 없이 오로지 자신의 힘을 동력 삼아 이동하는 탈것이다. 열악하지만 그래도 교육을 받고 임금노동을 하게 된 여성들이 이런 자전거를 선호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들을 정상적인 여성이라면 당연히 하는 결혼을 하지 않는, 자기주장 강한 여성으로 재현했다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이동하는 여성에 대한 당시 영국 사회의 불안과 혐오를 짐작게 한다. 이 시기에 등장한 근대의 교통수단들, 예컨대 배, 자동차, 비행기가 모두 남성이 조종하는 여성적 존재로 여겨진 것은 이동과 머무름에 대한 젠더적 상상력을 드러낸다.
움직이는 남자와 머무르는 여자의 이분법은 이제는 철 지난 이야기에 불과한 것일까? 조금씩 철 지난 이야기가 되어 가고 있긴 하다. 2015년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은 참정권과 함께 자동차를 운전할 권리를 획득했다. 공적 영역인 정치에 참여할 권리와 사적 영역인 집 밖으로 이동할 권리는 연결된 것이다.
여성들이 최신 이동수단의 잠재적 구매 고객으로 여겨지게 된 것은 이런 저간의 사정 변화와 관계가 있다. 특히 한국같이 산업화된 사회에서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신차를 개발하고 팔기에 바빠졌다. 자동차가 여성으로 이미지화되었던 광고에서 자동차를 모는 여성이 등장하는 광고가 많아졌다. 남성들이 움켜쥐었던 운전대를 여성들이 잡게 되는 것은 언뜻 긍정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성을 차의 소비자로 여기는 만큼 차를 만드는 노동자로 간주하는 일은 아직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나는 올해 4월, 이 지면에 이제까지 단 한 명의 여성도 채용하지 않은 현대자동차의 기술직 신입사원 공개채용이 이번만큼은 성별에 있어 공정하게 진행되기를 기대한다고 썼다. 200명 중 6명의 여성이 합격했다. 일단은 여성 합격자가 있었다는 데 의의를 둬야 하는 상황이다.
더 큰 문제는 환경이다. 그칠 줄 모르는 자동차의 증가세는 기후위기의 주요 원인이다. 널리 알려졌듯 기후위기의 핵심은 온실가스로 인한 지구 가열이다. 2022년 기준 500억 톤에 이르는 매년 배출되는 온실가스를 가능한 한 빠르게 0까지 줄여야 한다는 것이 이제까지 밝혀진 과학적 사실이다. 그런데 화석 연료 사용이 온실가스 중 4분의 3을 차지한다는 것, 화석 연료를 사용하는 모든 분야 중 자동차와 항공기가 주를 차지하는 교통 분야에서 유독 국가를 막론하고 화석 연료 사용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다.
매년 이 나라에서 태어나는 신생아 숫자는 줄어들고 있지만 자동차는 50만 대 이상 늘어나고 있다. 자동차 산업은 새로운 소비자를 찾아 그야말로 이동 중이며 여성은 새로운 잠재 소비자군이다. 여성들은 필요와 욕망에 의해 자동차 산업에 ‘자발적으로’ 포섭당하고 있다.
결과는 어떨까? 모든 땅이 자동차 다니기에만 좋게 바뀐다. 이는 곧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 이동하는 것이 어려워진다는 의미다. 요즘같이 좋은 날씨에 걷기에 나설라치면 곧 마주치는 자동차들 때문에 힘들어지는 서울 같은 대도시를 생각해보자. 한적해서 걷기에 좋다고 여겨지는 시골길은 상점, 집, 타인을 보기 힘들어 두려움에 곧 걷기를 포기하게 된다. 주로 자동차가 다니게 되면서 걷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거점들이 사라진 탓이다. 아이나 장애인, 노인들이 이동하기 어려운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건강한 성인들만이 거리를 채우는 한국의 대도시는 임신한 여성, 유모차를 끄는 여성과 남성, 아동, 장애인, 노인들에게 위험하고 불친절한 공간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자동차를 살 수밖에 없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겠다는 시민으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는 장애인들이 ‘민폐’로 여겨지는 한국에서 거리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자동차다.
오만 원권에 새겨진 신사임당과 초충도에서 여성들을 이동하지 못하게 했던 전근대적 가부장제 규범의 잔재를 본다. 자전거를 탄 신여성에 대한 비난에서 여성들의 이동을 최소화하려 했던 근대적 가부장제의 시도를 읽는다. ‘김여사’와 같은 멸칭은 아직 가부장제가 건재함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제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김여사’라는 멸칭에 저항하고, 여성을 공정하게 채용하지 않는 자동차 회사에 문제를 제기하며, 동시에 화석연료 사용을 증가시키지 않으면서 사회적 약자들의 이동성을 증가시킬 수 있는 이동수단에 대한 상상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지금의 체제를 벗어나 함께 이동하는 방법은 이런 질문들로부터 현실화될 것이다.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인 이한 작가와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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