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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빛낸 ‘홍콩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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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두 배우가 껴안았다. 관객 5,000명가량이 환호성을 질렀다. 지난 4일 오후 개막식에서 홍콩 배우 저우룬파(周潤發ㆍ주윤발)와 한국배우 송강호가 마주한 장면은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의 주요 장면 중 하나였다. 저우룬파는 홍콩 영화를 세계에 널리 알렸던 전설적 배우다. 송강호는 ‘기생충’(2019)으로 세계적 배우가 됐고, 지난해에는 ‘브로커’로 칸국제영화제 남자배우상을 한국 최초로 받았다. 아시아 영화의 과거와 현재를 각기 대표하는 두 배우의 조우는 여러 생각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 홍콩 영화는 1960년대부터 전성기를 누렸다. 1980년대가 황금기로 꼽힌다. 영화사 쇼브러더스가 견인차 역할을 했다. 싱가포르에 거점을 둔 이 회사는 1958년 홍콩 영화 산업에 진출했다. 쇼브러더스는 홍콩 밖 거대한 화교 네트워크를 주목했다. 방언 광둥어 영화가 주류이던 홍콩에서 표준 중국어로 영화를 만들었다. ‘세계화’ 전략은 성공했다. 홍콩 영화는 자본 축적을 통해 아시아 시장을 호령했다. 쇼브러더스는 1,600명이 근무하는 거대 스튜디오로 거듭났다.
□ 1960~70년대 쿵후 영화로 재미를 봤던 홍콩 영화는 80년대 홍콩 누아르로 한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저우룬파와 장궈롱(張國榮ㆍ장국영)이 주연한 ‘영웅본색’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류더화(劉德華ㆍ유덕화)와 량차오웨이(梁朝偉ㆍ양조위) 등 여러 홍콩 스타들이 사랑받았다. 1980~90년대 한국에서 홍콩 노래를 듣고 홍콩 영화를 보는 건 당연하게 여겨졌다. 2000년대 들어 홍콩 영화는 몰락했다. 날림 제작과 자기 복제가 원인으로 지적되나 홍콩 영화의 오랜 특징이라 설득력이 떨어진다.
□ 저우룬파는 5일 기자회견에서 1997년 홍콩 반환을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중국 당국이 심의 등 여러 제재를 가해 영화를 자유롭게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 영화의 성장은 큰 창작 자유도 덕”이라고 덧붙였다. ‘홍콩 정신’으로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소신 발언도 했는데 과연 가능한 일일까. 홍콩의 별 저우룬파는 부산영화제를 밝혔으나 황혼의 빛과 비슷했다. 20~30년 후에도 한국이 아시아 영화의 현재를 대표한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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