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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와 포옹한 폴란드의 르네상스맨, 즈지스와프 벡신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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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유명한 예술작품도 나에게 의미가 없다면 텅 빈 감상에 그칩니다. 한 장의 그림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맛있게 그림보기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림 이야기입니다. 미술교육자 송주영이 안내합니다.
2005년 2월 21일 늦은 밤, 폴란드 바르샤바의 한 아파트 앞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웅성거렸다. 폴리스라인 밖으로 나오는 시신 한 구를 본 주민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 아파트에서 가장 유명한 독거노인이 살해된 것이다. 체포된 범인들의 신원이 밝혀지자 사람들은 더욱 충격에 빠졌다. 노인을 돌보던 간병인의 19세 아들과 그의 16세 사촌이었다. 노인에게 100달러를 빌려달라고 요구했다가 말다툼이 났고, 급기야 이 어린 사내들은 무려 17차례나 노인을 칼로 찔렀다. 7년 전 사랑하던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떴고, 이듬해 약물로 자살한 아들의 시신을 수습했던 노인. 그가 겨우 다시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던 무렵이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자신이 그린 그림처럼 지독하게 비통하고 처참한 죽음이라고. 또 다른 누군가도 말했다. 참담하고 슬프지만 가장 고결하고 아름다운 예술가였다고. 그의 이름은 즈지스와프 벡신스키(Zdzisław Beksiński·1929~2005)다.
벡신스키의 그림은 기괴하다. 그의 그림은 한 번 보면 잊지 못할 만큼 강렬하다. 영화 '에일리언'의 디자이너인 스위스 화가 H.R. 기거, ‘판의 미로’로 유명한 기예르모 델 토로, 그리고 무수한 헤비메탈 그룹들도 벡신스키로부터 예술적 영감을 받았다고 말한다. 어둡고 무서운 그림은 미술사에 숱하게 등장했다. 흔히 ‘그로테스크(grotesque)’라는 미학 용어와 함께 소개된다.
고대 로마 건축물에 사용됐던 기이한 장식품이 15세기에 발견되면서 그로테스크라는 용어가 파생됐다.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꼭대기에 있는 '가고일(Gargoyle·인간과 박쥐가 혼합된 괴물)'이나 불교 사찰 입구를 지키는 '사천왕상'에서 그로테스크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악귀를 쫓아내기 위해 괴물을 만들어 교회와 사찰에 세운 이유는 신성한 아름다움을 위해 악하고 추한 것을 함께 안아야 한다는 성찰일지도 모른다.
네덜란드의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1450~1516)를 필두로 영국의 시인 겸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 영국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1909~1992) 등의 어둡고 기괴한 그림은 줄곧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20세기 초 프로이트 심리학이 등장하고 초현실주의 예술이 크게 유행하면서 은밀한 매력의 그로테스크는 어쩐지 흔해졌다. 그래서 벡신스키의 그림은 이미 유행했던 초현실주의 화풍에서 다를 바 없다며 저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벡신스키의 그림은 분명히 "흔해 빠진 기괴함"과 다르다. 그 이유는 벡신스키의 어린 시절에 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어찌 보면 죽음은 평범한 일상의 사건이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생성과 소멸의 죽음이 아닌, 전쟁과 학살이라는 자연스럽지 않은 죽음을 어린 시절에 반복해 경험하는 일은 결코 흔치 않다. 벡신스키의 어린 시절에 우리가 주목하는 이유다. 벡신스키는 훗날 여러 인터뷰에서 "제발 내 그림을 해석하지 마라! 무슨 뜻이냐고 자꾸 묻지 말라!"며 강박적으로 요구했지만, 감상자들은 결국 그의 개인사를 소환하게 된다. 인류 역사에서 비정상적인 죽음이 집중적으로, 집단적으로 일어났던 곳에서 그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때 이 열 살 소년은 뭘 봤을까?
지난해 7월, 폴란드 정부는 20조 원을 들여 한국산 무기를 구매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다양한 분석이 있지만, 폴란드와 러시아(구소련)의 오랜 악연을 떠올리게 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 중인 지금, 폴란드는 많은 우크라이나 난민을 받아들이면서 그 어느 때보다 안보에 집중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는 언제나 서로 맞물려 있다. 훈족의 등장, 게르만족의 이동 이후 8세기 무렵, 한 뿌리였던 슬라브인은 동슬라브(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서슬라브(폴란드, 체코), 남슬라브(불가리아, 세르비아)로 나뉘었다. 그중 비옥한 초원의 나라, 폴란드는 수많은 침략과 분할을 겪어야 했다. 15-18세기 ‘윙드후사르’라는 강력한 기마부대를 자랑했던 폴란드였지만 18세기말 주변국에 의해 계속 분할된 후 123년간 지도에서 사라져야 했다.
1918년에 다시 독립했으나 1939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고, 독일과 소련은 상호불가침조약을 맺으며 폴란드를 나눠 가졌다. 같은 해 폴란드 남부에서는 인종, 문화, 종교가 달랐던 주민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학살이 벌어졌다. 나치는 폴란드에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세우고 수많은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냈다. 그사이 폴란드 임시정부는 영국에 있었다. 20만 명의 폴란드군이 연합군과 함께 싸웠고, 본국에서는 레지스탕스(지하군)가 목숨을 바쳤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소련이 연합군 편에 섰지만, 그때는 이미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이 폴란드의 엘리트 수만 명을 학살한 후였다.
1944년 폴란드인들은 소련의 진격을 기다리며 나치군과 싸웠지만 결국 바르샤바는 폐허가 되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폴란드 임시정부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미국과 영국이 얄타회담에서 소련의 폴란드 점령을 사실상 인정했고, 연합군으로 싸웠던 폴란드 임시정부는 불법단체로 취급됐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폴란드는 인구 대비 세계에서 가장 큰 인명피해를 입었다. 전체 국민의 1/6을 잃었다. 1990년 폴란드 민주화가 이뤄졌지만 과거의 상처와 아픔은 지독했다. 벡신스키는 그 현장에 있었다.
벡신스키는 1929년 폴란드 남부 사녹(Sanok)에서 태어났다. 그가 10세가 되던 1939년 아돌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했고 폴란드에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만들었다. 사녹은 폴란드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은 지역이었다. 주민의 1/3을 차지했던 유대인이 사라지는 것을 12세의 벡신스키는 목격했다. 그가 16세가 될 무렵 전쟁은 끝났지만 그사이 수많은 죽음을 지켜봤다. 내성적 성향의 소년은 점차 음악과 책에 몰입하며 성장했다.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 후 건축기사로 일하면서 취미로 사진을 찍었다.
28세의 벡신스키가 공개한 사진작은 당시 유행과는 스타일이 달랐다. 피사체를 있는 그대로 포착하는 스트레이트 사진이 주류였던 때에 신체를 조각낸 듯 연출한 그의 사진은 평단으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벡신스키는 혹평에 반박하는 기고문을 쓰며 항변했으나 이 과정에서 타인의 평가와 비평에 상처를 입었고, 이후 자기 작품에 대한 그 어떤 비평도 거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건축과 사진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회화에 몰두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 20년 동안 벡신스키가 그려낸 작품들을 ‘환시미술(fantasy art)’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의 작품은 모두 제목이 없다. 초현실주의, 상징주의, 무의식 등 용어를 쓰며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버럭 화를 내기도 했다. 그는 “그냥 들으면 되는 음악처럼 내 그림도 그냥 보면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그의 그림은 음악 속에서 태어났다. 벡신스키는 매일 오후 5시에 퇴근하는 작업 ‘루틴’(습관)이 있었는데, 작업 중에는 교향곡, 오페라, 하드록, 팝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볼륨을 최대로 해 들었다.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는 아예 음악을 듣지 않았다.
벡신스키는 자기 그림에 대한 해석과 해독을 거부했지만, 우리는 그의 그림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떠올리게 된다. 폐허가 된 바르샤바처럼 폐허가 된 건물, 해골로 변한 사람, 부서진 군인의 투구에서 전쟁의 상처가 느껴진다. 벡신스키가 자주 사용한 ‘프러시안 블루(Prussian blue)’에 주목하는 사람들도 있다. 안료로서는 독성이 없지만 같은 시안화물 속성을 가진 ‘치클론b’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독가스로 사용되었고, 독가스실 벽면에 푸른색의 흔적을 남겼다. 벡신스키는 종종 어떤 문구나 숫자를 그렸는데 한 번도 그 의미를 밝힌 적이 없다. 그러나 그의 1978년 작품 속에 있는 “In hoc signo vinces (이 징표 아래 승리를 얻으리라)”라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라틴문구는 미국 나치당이 사용했던 슬로건이었고, 독가스실을 연상하게 하는 푸른색이 함께 배치됐다며 마치 암호를 해독하듯 그림을 분석하는 이도 많다.
물론 벡신스키 본인은 “그냥 그렸을 뿐”이라고 답했다. 자신의 전시회에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았고, 사람 많은 콘서트장에도 참석하지 않을 정도로 ‘은둔자’에 가까운 삶을 살았던 벡신스키가 결핍의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그는 가족과 이웃에게 웃으며 농담도 잘하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수도승처럼 자신을 세상과 분리하는 자발적 은둔자였다. 어려서부터 강박증이 있었지만, 그 덕분에 그는 캠코더로 매일 작업 전후를 기록했다. 마치 건설 현장에서 근무하는 감독관처럼 건조한 어투로 어디를 조금 더 보완해야 하겠다는 짧은 멘트가 담긴 그의 영상일기를 토대로 그의 말년을 다룬 영화 "마지막 가족”(2016)이 제작되기도 했다.
스스로 자기 그림을 알리려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벡신스키가 세상에 알려진 데에는 폴란드 출신 프랑스 법률가였던 피오트르 드모호프스키(Piotr Dmochowski)의 역할이 컸다. 드모호프스키는 “1972년에 처음 벡신스키의 그림을 만났는데, 그토록 많은 갤러리에서 많은 작품을 봤지만 벡신스키는 충격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의 그림을 위해 살았다”고 회고했다. 이후 그는 아예 직장을 그만두고 벡신스키 갤러리를 열었다.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벡신스키를 알리며 그의 작품 대부분을 사들였다. 독점에 가까웠다. 드모호프스키가 벡신스키의 생계를 책임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그 때문인지 이들의 관계는 애증의 사연이 많아 보인다.
현재 81세가 된 드모호프스키는 여전히 벡신스키의 온라인 갤러리를 두고 있지만 최근 업데이트가 거의 없다. 복잡한 사연이 있어 보이지만, 결론적으로 그의 작품에 대한 모든 권리는 폴란드 사녹역사박물관에 있으며, 벡신스키의 공식 소셜미디어(SNS) 계정은 카밀 실리빈스키(Kamil Śliwiński)란 인물이 운영하고 있다. 벡신스키가 사망한 후 폴란드 사녹 시정부는 그를 기리는 박물관을 열었고, 미국 네바다주에서 매년 개최되는 ‘버닝맨’ 행사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거대한 붉은 T자형 십자가가 세워졌다.
2015년 유족들은 벡신스키가 젊은 시절에 쓰고 봉인했던 40여 편의 단편소설을 모아 출간했다. 아쉽게도 그의 작곡 작품들은 현재 확인할 수 없지만, 건축, 문학, 음악, 사진, 조각, 그리고 회화까지 섭렵했던 그를 ‘폴란드의 르네상스맨’이라 부를 만하다. 지즈스와프 벡신스키.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참담하고 처참했던 시간, 공간을 상징하는 폴란드 현대미술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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