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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왜 미국을 '투명인간' 취급했을까?

입력
2023.10.10 00:00
27면
러시아를 방문 중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13일(현지시간) 러시아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상봉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4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러시아를 방문 중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13일(현지시간) 러시아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상봉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4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북한이 무단 월북한 주한미군 병사인 트래비스 킹 이병을 풀어주는 과정에서 미국을 '투명인간' 취급했다. 과거와 같이 석방 조건으로 미국 고위급 인사 방북을 요구하거나, 추방 방식을 논의한다는 명목으로 교섭을 시도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과거와 확연히 다른 양태다. 만약 이것이 항간에서 논의되는 북한 외교 노선의 '찐 변화'라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각에서는 북미 간에 석방 방식을 논의하는 물밑 접촉이 당연히 있었을 것이라 추측하고 또한 그러한 접촉이 경색된 북미 대화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될 것이란 기대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은 평양 주재 스웨덴 대사관과 중국을 통해 킹 이병 문제를 처리했을 뿐, 북미 간 접촉은 전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 정부는 이번 석방에 '대가는 없었다'라고 했는데, 정황으로 볼 때 사실일 것이다. 장장 두 달이 넘는 억류 기간 동안 북미 간 직접 교섭이 없었고, 그 이유가 북한 측이 한사코 접촉을 피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북한은 마치 미국이 존재하지 않는 듯 행동했다." 내막을 이해하는 한 인사의 전언이다.

북한은 이런 식으로 자신이 미국과의 접촉에 무관심하다는 시그널을 확실히 보낸 셈이다. 북한의 '미국 패싱'은 근년 들어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북한은 2019년 북미 하노이 회담 결렬 후 미국에 '셈법을 바꾸라'고 했지만, 호응이 없자 그 해 7월 "제재 해제에 더 집착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미 전략노선 수정을 시사했다. 그 해 12월 김정은 주재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변화된 대내외적 정세에 맞게 국가의 전략적 지위와 국력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김정은이 2019년 신년사에서 밝힌 '새로운 길'을 따르겠다는 것이다.

그 후 북한의 행보를 보면 김정은의 '새로운 길'이 현재로서는 현실화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북한이 미국과 멀어지는 것에 비례해서 핵무기와는 갈수록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9월 최고인민회의를 열고 2012년 핵보유를 헌법에 명시한 지 11년 만에 소위 '핵무기 고도화'와 '핵 선제 사용'으로 요약되는 '핵무력정책'의 법제화를 단행했다. "핵보유국의 현 지위를 절대로 변경시켜서도, 양보하여서도 안 되며 오히려 핵무력을 지속적으로 더욱 강화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우리 당과 정부가 내린 엄정한 전략적 판단"이라고 못 박았다.

새로운 길을 걷는 북한은 러시아라는 새 친구도 얻은 듯하다. 백악관은 푸틴-김정은 회담을 '식량과 무기의 거래'(an arms-for-food deal)라 폄하했다. 이러한 판단은 복잡한 상황을 간결한 말로 '정리'하는 데는 효과적일 수 있지만, 분석적인 측면에서는 상황에 대한 호도가 될 수 있다.

러시아는 금년 3월 발표한 '러시아연방 대외정책개념'(The Concept of the Foreign Policy of the Russian Federation)에서 미국 주도 국제질서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반미·반서방 연대를 강화하겠다고 천명했다. 북한처럼 러시아도 미국과 결별해 '새로운 길'을 걷기로 작정한 것이라면 문제는 매우 심각해진다.

한미가 가치 연대를 앞세우는 것처럼, 북러 밀착은 갈수록 가치적 동질감에 기반하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러 밀착을 과소평가할 이유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성현 조지HW부시 미중관계기금회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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