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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면 안 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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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아침 아내와 함께 종로 조계사 뒤에 있는 수송공원에 갔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게 된 자칭 '역사 덕후'인 통번역사 한 분이 추석 연휴에 신청자들을 모집해 근대사에서 큰 의미가 있는 수송동과 인사동 일대를 돌아보자고 했기 때문이다. 사적인 취미생활이고 무료라고는 했지만 열 명분의 도슨트용 무선 마이크와 앰프·스피커까지 갖춘 역사 투어였다. 나는 워낙 역사를 모르는 데다가 근현대사는 중고등학교 과정에서도 얼버무린 부분이 많아서 새삼 놀라는 대목들이 많았다. 특히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지배층·종교계의 복잡한 계보와 이합집산에 한숨이 절로 나왔고 그 와중에도 조국 독립을 위해 전 재산과 목숨을 바친 분들 앞에서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인사동을 지나 운현궁 근처 천도교 수운회관에 갔을 때 단골집이었던 '간판 없는 김치찌갯집'의 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것이 보였다. 건강상 휴업이라고 쓰여 있는 걸 보니 주인 할머니가 아직 편찮으신 모양이었다. 이 음식점은 한때 마약 김치찌갯집이라고 불릴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메뉴는 김치찌개, 칼국수, 콩국수가 전부인데 대부분 김치찌개만 먹었다. 사람들은 김치찌개에 어묵과 라면 혹은 칼국수 사리를 추가해서 먹었는데 불량하면서도 알싸한 맛이 그만이었다. 영화평론가 오동진 기자는 '거기 가서 김치찌개를 안주 삼아 소주를 물컵에 한잔 따라 마시면 정말 하루를 불콰하게 보낼 수 있었는데...'라며 아쉬워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타격을 입은 데다가 할머니마저 누워 계시니 방법이 없다. 점점 사라지는 것들이 늘어난다는 생각에 우울했다.
그러나 모든 게 사라지고 잊히기 마련이라도 절대로 사라지면 안 되는 것들도 있다. 국민들의 문화생활을 위한 정책과 제도가 그렇다. 정부는 올해 '국민독서문화증진 지원' 예산을 전액 삭감했고, 예산 코드 1433-308까지 삭제했다. 2023년 예산안에 59억8,500만 원으로 책정되었던 칸이 2024년도는 텅 비게 됐다. 지역서점 활성화 예산 11억 원도 전부 삭감되었다. 지역서점에서 진행하는 750여 개 문화 프로그램이 내년엔 모두 사라지게 된 것이다. 결국 내년 독서 관련 예산은 '독서대전', '지역독서대전', '책읽는도시협회지원' 등 일부 사업들을 위한 10억 원가량뿐이다. 문체부는 "여태까지 개별 서점들을 지원해 왔다면, 내년부터 지역서점 관련 공동망·운영기반 개선 등 인프라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바뀐 것이지 전액 삭감한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지만 그야말로 군색한 변명이다.
얼마 전 서울의 작은 서점에서 북토크 겸 글쓰기 강연을 하고 "앞으로 이런 행사로 만나는 건 내년에 힘들지 모르겠네요"라고 끝인사를 했다. 한국서점조합연합회가 밝힌 대로 '문체부 전체 예산의 0.2%밖에 되지 않는 11억 원'이 모두 사라졌으니 내년부터 북토크나 글쓰기 강연을 하려면 개인 돈을 들일 수밖에 없는데, 월세도 내기 힘든 작은 서점 사장님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봐야 한다.
나는 이 정부가 책 읽는 국민을 싫어한다고 믿고 싶지 않다. 다만 독서라는 건 취미생활을 넘어 전 국민의 안녕과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기에 잘못된 정책 실행을 되짚어 주기를 촉구하는 바이다. 다른 건 다 사라져도 되지만 책 읽는 모습만은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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