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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있는 시골길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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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즈음해서 시골로 내려가 벌초와 성묘를 하고 오면 마음에 아픈 곳이 생긴다. 시골이 너무 위험한 곳으로 바뀐 지 오래지만 나아지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이다. 겉보기에는 공회당도 반듯하고 이층주택도 들어섰다. 그런데 시골길을 가도 가도 사람 다니는 인도(人道)가 없는 것이다.
내가 "우리 시골"이라 부르는 곳은 경북 영덕군 영해면 원구동인데 50년 전 마을 가운데로 난 길의 아늑한 풍경을 나는 잘 기억하고 있다. 양편에 포플러 나무가 줄지어 섰고, 먼 산모롱이에서 휘어진 흙길. 소달구지가 지나가고, 물동이를 인 아주머니들이 오가고, 할머니들이 마실을 다녀오거나 도포 차림의 할아버지가 제삿집을 찾아가곤 했다.
35년 전쯤 이 길이 포장된 것은 신나는 일이었다. 길 가운데 잡풀 사이에 똬리를 튼 뱀과 마주치는 일이 없어졌다. 비가 와도 질척거리지 않고 버스가 지나도 먼지가 날리지 않았다. 그런데 차들이 많아지며 이 길은 사람과 수레가 함께 오가는 길이 아니라 오로지 차들만이 달리는 도로로 변해버렸다. 보행로는 물론 갓길도 없다. 8톤 트럭과 SUV, 승합차와 세단이 마을을 가로지를 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나라 시골 대부분에서 만나는 풍경이라는 점이 놀랍다. 나는 원주 매지리의 토지문화관, 담양 용대리의 글을낳는집, 청송 진안리의 객주문학관 같은 레지던스 창작시설에서 서너 달씩 지내봤는데, 여기에서 다른 동네로 걸어가려면 말 그대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몇 걸음마다 앞뒤로 살피고, 멀리 차가 달려오면 차도 바깥의 논 가녘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운전자를 바라보며 가슴을 졸여야 한다.
거제도에서 자란 내 친구는 "그런 길 때문에 네댓 해 동안 동네 어르신이 일곱 분이나 차에 치여 돌아가셨다"고 했다. 내 할아버지도 고즈넉한 가을밤에 그렇게 비극적으로 돌아가셨다. 이런 일은 주목받지 못할 뿐 시골 마을마다 숱하게 많다. 면 소재지조차 인도 없는 도로가 즐비하고, 초중고등학교는 근처에 걸어 다닐 길이 없다. 도시에서처럼 스마트폰을 보며 걷는 아이는 아무도 없고 겁에 질려 있다.
조선 왕실은 길을 내는 일에 굉장히 엄격했다. 마차처럼 바퀴 달린 것의 운행을 금해서 여객마차 우편마차가 없었고, 소달구지만 허용했다. 그게 국방이고 통치였다. 자연스레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없었다. 이게 포장되면서 인도가 고스란히 사라진 것이다.
추석 때 고향으로 몰고 간 '쏘나타' 승용차며, 부모님께 선물한 '갤럭시' 폰, 그리고 '트롬' 세탁기는 그간 얼마나 많이 개선해서 지금의 이 성능과 디자인이 되었는지, 생각해 본다. 우리는 "바꾸고 바꾸며" 여기까지 왔다. 흙길을 포장한 일은 잘한 것이다. 그런데 그 후로 "또 바꾸는 일"을 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어느 결엔가 이런 상태를 비판하기보다는 책임져야 하는 세대가 돼 버렸다. 그래서 마음 편히 걸어 다니던 시골길에 대한 기억을 나와 같이 가진 벗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길이 끊임없이 이어질 때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을 꿈꾼다"고. 이런 일에 세금을 과하다 싶을 만큼 쏟아붓는 일에 반대하지 말자고. 그래서 늘그막의 어느 추석 연휴에는 고향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시골마다 이어진 '둘레길'에서 다정하게 트레킹을 즐겨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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