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취소송 얼룩진 소설 '토지' 배경 마을…전국 매일 60여건씩 냄새민원

입력
2023.10.04 04:30
수정
2023.10.05 08:45
1면
구독

유엔 관광마을 하동군 악양면
법정다툼에도 악취 갈등 그대로
5년6개월 치 악취 민원 전수분석
매일 평균 63건... 도심서도 갈등
규정미비, 대응부족... 총체적 난국

편집자주

전국 곳곳에서 '후각을 자극해 혐오감을 주는 냄새', 즉 악취로 인한 사회적 갈등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악취 민원은 무수히 쌓이는데 제대로 된 해법은 요원합니다. 한국일보는 16만 건에 달하는 데이터 분석을 토대로 국내 실태 및 해외 선진 악취관리현장을 살펴보고, 전문가가 제시하는 출구전략까지 담은 기획 시리즈를 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관광객들이 경남 하동군 악양면에 위치한 매암차문화박물관을 거닐고 있다. 매암차문화박물관은 근래 악양면에서 뜨고 있는 ‘인증사진’ 명소다. 매암차문화박물관은 A농장과 직선거리로 600m가량 떨어져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관광객들이 경남 하동군 악양면에 위치한 매암차문화박물관을 거닐고 있다. 매암차문화박물관은 근래 악양면에서 뜨고 있는 ‘인증사진’ 명소다. 매암차문화박물관은 A농장과 직선거리로 600m가량 떨어져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냄새가 얼마나 심하냐면, 개똥을 종일 코에 매달고 있는 것 같아요. 머리가 지끈지끈합니다."

지난달 7일 경남 하동군 악양면에서 만난 B씨는 귀촌 2세다. 그가 사는 고장은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주무대다. 지리산 골짜기 사이로 펼쳐진 드넓은 평사리 평야와 최참판댁, 박경리문학관 등이 악양면의 관광자원이다. 악양면 평사리는 지난해 유엔세계관광기구(UNWTO)의 '최우수관광마을(Best Tourism Village)'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런데 주민들에게 이곳은 '관광마을'이 아니라 차라리 '악취마을'이다. 돼지 약 2,000마리를 키우는 악양면 A농장의 똥냄새 때문이다. B씨는 "해 떨어지면 냄새가 마을을 다 덮어버린다"고 했다. B씨의 동생도 그 냄새를 기억한다. 그가 다녔던 악양중학교가 농장과 약 200m 거리로 가까워서다. 학교 관계자는 "악취 때문에 야외 수업을 중단했다. 일부 학생은 점심 식사 중 구토까지 했다"고 말했다.주)1

급기야 주민들은 5년 전 하동군청에 A농장 주소지를 특정해 '악취가 심한 곳으로 의심된다'고 민원을 넣었다. 군청은 경남 보건환경연구원에 의뢰해 이곳의 악취를 측정했다. 결과는 기준치 부적합. 의심은 사실이었다. 악취를 4차례 측정한 하동군은 결국 2020년 9월 A농장에 한 달간 '돼지사육을 중단하라'는 사용중지명령을 내렸다. 농장주 김윤수(71·가명)씨는 '농장 운영이 불가능해진다'며 명령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A농장과 악양면 주요 공공시설과의 거리. 그래픽=김문중 기자

A농장과 악양면 주요 공공시설과의 거리. 그래픽=김문중 기자

기자와 만난 김씨는 "돼지를 다른 지역 농장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돼지가 다치는 경우도 많다. 손해가 막심하다"고 호소했다. 주민들은 악취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이나 군의 관광산업 발전을 위해선, 아예 A농장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김씨가 하동군에 제기한 소송은 지난해 9월 대법원에서 김씨의 패소로 끝났다. 그는 올 1월 돼지를 한 달간 다른 농장으로 이전했지만, 사용중지명령이 끝나자 다시 A농장으로 돼지들을 옮겼다. 주민들은 아직도 악취가 난다고 이야기한다. 법정다툼이 종료됐어도 악취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한국일보는 악취 민원을 1차 접수하는 전국 모든 기초지자체 및 세종시에 지난 6월부터 약 4개월에 걸쳐 정보공개를 청구해 5년 치 민원의 제기 시점과 장소, 내용 등을 수집, 전수분석했다. 그 결과 2018년 이후 올 6월까지 악양면 주민이 군청에 제기한 악취 민원 중 '냄새가 난다'고 짚은 지역정보가 확인된 것만 7건이었다. 하동군에서 95건, 경남으로 범위를 넓히면 1만2,568건, 전국적으로는 12만6,689건이다. 5년 치 악취 민원을 전국 단위로 집계한 것은 국내 최초의 시도다.

악취 의심지역 관련 민원은 5년 6개월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평균 63건씩 제기돼 왔다. 2018년 2만999건(일평균 57건)으로 시작해 2019년 2만5,925건(71건)으로 정점을 찍었다. 2020년부터는 다소 줄었으나 2021년 2만3,309건, 2022년 2만2,916건으로 꾸준했다. 민원을 넣어도 해결이 안 되니 또 민원을 넣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규정도 미비한 데다 지자체들이 소극적으로 대응한다는 비판마저 제기되고, 그사이 갈등은 해결의 기미 없이 깊어갔다. 민원대장 관리도 허술했다.

한국일보는 쌓여만 가는 악취 민원의 심각성을 심층취재 했다. 방대한 데이터 분석을 토대로 전국 현장을 돌며 민원인은 물론, 악취 사업장, 담당 공무원을 만났다. 이들의 고충과 함께 일본, 네덜란드의 선진 악취관리 현장,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출구전략'까지 담은 기획시리즈를 오늘부터 총 5회 연재한다.

그래픽=신동준 기자

그래픽=신동준 기자


제주시 민원 최다... 타는 냄새, 가스 냄새도 호소

우선 민원 데이터가 보여준 원인은 예상보다 다양했다. 악취 하면 흔히 축사에서 나오는 가축분뇨나 사료 냄새를 원인으로 떠올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약 13만 건에 달하는 민원 중 축산업, 농업 관련 시설 때문인 것은 29.1%에 그쳤다. 나머지 중 15%는 공장·사업장이 냄새 배출원으로 지목됐고, 14%는 생활악취가 불쾌하다는 민원이었다. 생활악취로는 식당에서 나오는 음식물쓰레기와 하수구 냄새, 가스 냄새와 타는 냄새 등이 주로 많았다. 적잖은 악취 민원이 서울 강남을 비롯한 도시 한복판에서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도 갈등을 키우는 배경으로 분석됐다.

민원이 가장 많았던 지자체는 5,268건이 발생한 제주시다. 2018년부터 하루 평균 2.6건씩 발생했다. 제주시 민원의 95% 이상은 가축, 가축분뇨 때문이었다. 3,000건 이상의 악취 민원이 제기된 시·군·구는 6곳으로, 인천 서구(5,144건), 경남 양산시(4,653건), 인천 미추홀구(4,589건), 충남 아산시(3,995건), 서귀포시(3,391건), 부산 기장군(3,335건)이었다. 이 중 인천 서구, 양산시, 인천 미추홀구는 하루 2건 이상씩 지역 내에서 접수됐다.

그래픽=김문중 기자

그래픽=김문중 기자

악취 민원 지자체들은 주로 현장을 ‘지도’하는 선에서 그치고 있다. 그러니 냄새를 유발하는 사업장도, 민원인도 냄새가 과학적으로 어느 수준인지 알 길이 없다. 올 5~7월 전남 보성군 웅치면 용반리의 양돈농장 ‘덕림축산’을 특정하여 제기된 악취 민원은 4차례였다. 그러나 민원에 대응한 군청의 출장보고서를 본보가 입수해 확인한 결과, 악취가 얼마나 심한지 실측한 기록은 한 글자도 찾을 수 없었다. 과태료 부과나 사육두수 감축 통보를 통해 농장주를 압박한 정황만 있었다. 반복되는 민원에 시달린 농장주 정연우씨는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말았다.

전남 보성군 소재 양돈농장으로 제기된 악취민원에 의해 보성군청이 6~7월 4차례에 걸쳐 현장지도를 한 뒤 작성한 출장보고서의 '점검결과' 항목. 실측의 필요성이 인정됐고, 농장주 측도 객관적인 악취실측을 원했으나 실제로 검사는 실시되지 않았다. 자료는 농장주 측이 제공한 군청 자료 취합

전남 보성군 소재 양돈농장으로 제기된 악취민원에 의해 보성군청이 6~7월 4차례에 걸쳐 현장지도를 한 뒤 작성한 출장보고서의 '점검결과' 항목. 실측의 필요성이 인정됐고, 농장주 측도 객관적인 악취실측을 원했으나 실제로 검사는 실시되지 않았다. 자료는 농장주 측이 제공한 군청 자료 취합

민원 건수와 비교해 확인된 실측 건수는 현저히 낮다. 제주도가 어기구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악취 민원에 대한 실측 결과’ 원자료에 따르면 전국서 민원이 가장 많은 제주시에서 5년여간 민원에 대응해 법정검사기관이 공식적으로 악취를 실측한 경우는 584건(실측률 11%)에 불과했다. 민원이 4,600건 이상 쌓인 경남 양산시도 악취 실측은 920건에 그쳤다. 양산시 관계자는 “민원이 올 때마다 다 측정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실측을 아무리 많이 해도 사업장 1곳 당 월 1건 정도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일부 지역에선 ‘의도’를 갖고 민원을 제기하는 사례도 의심됐으나, 지자체에서도 추정만 할 뿐 막을 방법은 마땅치 않다. 서울 노원구 월계동의 경우 한 주소지에만 2018년 2월 중순부터 6월 초까지 약 3개월 반 동안 186건의 악취의심지역 민원이 제기됐다. 노원구 관계자는 "2018년 당시 아파트로 재개발을 하던 곳이었는데, 해당 지역으로부터 보상을 원하는 분들이 악취를 이유 삼아 다량의 민원을 넣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악성·중복 민원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일선 공무원들은 악취 민원이 관할 지자체 내에서조차 잘 관리되기 어려운 구조라고 입을 모았다. 익명을 요청한 한 기초지자체의 환경과 담당자는 "악취 종류마다 소관 부서가 지자체마다 다르니 민원 사무를 떠넘기거나 미루기 좋은 여건"이라고 털어놨다.

민원대장 관리 허술... 개인정보 줄줄 새

민원의 진정성, 지속성 여부는 악취방지법에 따른 악취관리지역 지정 등 규제를 적용하는 주요 기준이 된다. 주)2 제대로 된 악취 관리를 위해 일선 지자체가 악취 민원을 철저히 관리하고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민원 관리는 허술했다. 관할지역의 악취 민원이 몇 건인지조차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전남 보성군은 본보가 지난 6월 악취의심지역 민원을 정보공개청구했을 땐 2018년 1월부터 올 상반기까지 257건을 접수했다고 밝혔다. 이후 7월 보성군으로부터 다시 확인한 악취 민원은 같은 기간 약 340건이었다. 정보공개 당시 없었던 민원이 '갑자기' 90건 가까이 늘어난 경위에 대해 보성군 관계자는 "수기로 작성해 놓던 민원대장을, (본보의 정보공개청구가 들어오자) 전산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누락된 것 같다"고 해명했다. 주)3

악취의심지역을 신고한 민원·피민원 측의 계좌번호, 휴대폰번호, 주민번호를 비식별화 조치 없이 제3자에게 노출한 기초지자체도 10곳이나 됐다. 이는 본보가 악취 민원에 대응해 실시된 실측결과 여부를 확인하고자 별도의 정보공개청구를 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주)4 이들 지자체가 유출한 악취 관련 민원의 개인정보는 휴대폰 번호, 이메일, 계좌번호, 주민번호 등을 합쳐 총 535건이었다. 특히 서울 서대문구는 휴대전화번호만 452건, 계좌번호 1건, 주민번호 3건을 정보공개자료에 있는 그대로 노출했다. 구 관계자는 "민원 내용을 타 부서에서 전달받아 정리하는 과정에서 오류와 실수가 있었다"고 했다.

악취 민원 및 실측 결과 자료의 처리 과정에서 제3자에게 민원 피민원 측의 개인정보를 유출한 지자체 자료 중에서 개인정보를 검출한 내용. 그래픽=송정근 기자

악취 민원 및 실측 결과 자료의 처리 과정에서 제3자에게 민원 피민원 측의 개인정보를 유출한 지자체 자료 중에서 개인정보를 검출한 내용. 그래픽=송정근 기자

※ 한국일보는 전국 기초지자체 대상 정보공개청구 과정에서 지자체들이 노출한 악취의심지역 민원-피민원 측의 개인정보를 이용해 개인 또는 법인에게 연락을 취한 사실이 없습니다. 취재팀은 해당 정보를 비식별화 처리하여 본 기사의 보도 목적으로만 활용했으며, 그 외엔 어떤 용도로도 활용하지 않고 전량 파기했습니다.

[인터랙티브] 전국 악취 지도 '우리동네 악취, 괜찮을까?'

※ 한국일보는 2018년 1월부터 2023년 상반기까지 전국 모든 기초지자체 및 세종시가 접수한 악취의심지역 민원 12만 6,689건과, 이 민원에 대응해 냄새의 정도를 공식적으로 실측한 데이터 3만 3,125건을 집계해 분석했습니다. 정부와 지자체는 내가 사는 곳의 쾌적함을 얼마나 책임지고 있는지 살펴보세요.

(위 URL이 열리지 않을 경우 링크를 복사하세요)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100420087210963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1 주)
악양중학교 관계자의 언급은 B농장주 김윤수(71·가명)씨와 하동군수 간 사용중지명령취소 행정소송 판결문(2021년 6월 창원지방법원 선고)에 기재.
2 주)
악취방지법 6조(악취관리지역 지정) 1항의 1호 및 2호 참조
3 주)
한국일보는 전국 악취의심지역 민원 데이터를 수집하면서 전남 보성군처럼 민원 건수 등이 누락되는 경우를 막고자 약 130곳의 기초지자체엔 2차례(6월 1차, 7월 2차)에 걸쳐 정보공개청구를 했다.
4 주)
취재팀은 행정안전부의 정보공개청구 홈페이지에 각 지자체 대상으로 '악취 민원 건별 실측결과'를 정보공개청구하면서 지자체들이 본보에 공개한 민원정보 파일을 있는 그대로 참고용으로 업로드했다. 정보공개청구 홈페이지엔 기관들이 공개하는 전자파일에 개인정보 유출 여부를 자동 검출하는 기능이 있다. 홈페이지는 서울 서대문구 및 관악구-노원구, 대전 유성구, 인천 미추홀구, 경기 군포시, 경기 고양시 일산서구, 충남 아산시, 경남 김해시, 전남 신안군 등 기초지자체 10곳이 작성한 정보공개용 파일에서 개인정보를 검출했다.
윤현종 기자
하동= 이현주 기자
오지혜 기자
박서영 데이터분석가
문예찬 인턴 기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