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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영 "육성회비 못 낸 학교 대신 간 시장과 복덕방, 그게 내 자산"

입력
2023.09.28 09:00
수정
2023.09.28 09:51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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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그우먼' 김신영 인터뷰①
'전국노래자랑' 1년 "농사꾼 심정... '이렇게 사는 거지' 배워"
결핍이 '공감'의 밑거름... "엄마, 아빠 없이 할머니와 오는 아이들 보면..."

김신영은 "올해가 데뷔한 지 20년인데 촬영하고 '뭔가 개운하게 방송을 끝냈다'란 느낌이 든 건 '웃찾사'와 '전국노래자랑'"이라고 말했다. 안다은 인턴기자

김신영은 "올해가 데뷔한 지 20년인데 촬영하고 '뭔가 개운하게 방송을 끝냈다'란 느낌이 든 건 '웃찾사'와 '전국노래자랑'"이라고 말했다. 안다은 인턴기자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 함께 모여서 부드럽게 춤을 춥시다." 2일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 김신영(40)은 KBS1 '전국노래자랑' 녹화에서 "여러분 같이 불러주세요"라고 말한 뒤 계은숙의 노래 '노래하며 춤추며'(1979)를 목청 높여 불렀다. 방청석의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진행자가 무대에 먼저 올라 노래까지 부르고 나선 것이다. 1980년대 한국과 일본에서 두루 사랑을 받았던 계은숙의 노랫가락이 흐르자 노년 방청객들은 손뼉을 치며 어깨를 덩실거렸다.

김신영은 여느 연예인들처럼 스태프들이 차려 준 '밥상'에 숟가락만 얹지 않았다. 그 밥상을 손수 차렸다. "이 곡을 작사, 작곡한 분(안언자·김현우)들이 결혼했는데 피로연에서 정말 행복한 모습으로 노래하고 춤추는 하객들을 보면서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하더라고요. 가장 행복한 때를 기념하는 노래인 거죠. '전국노래자랑'이 그런 곳이니 이 노래로 분위기를 좀 띄워야겠다 싶어 요즘엔 녹화 전 이 노래를 부르고 시작해요". 그는 초대 가수 현숙을 소개한 뒤 오른팔을 들어 까마득한 선배와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퇴장했다. 일본 만화 '슬램덩크'에서 골을 넣은 풋내기 강백호가 백전노장 안 감독에 다가가 그와 손뼉을 마주치며 경기에 몰입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세상을 떠난 송해의 뒤를 이어 지난해 9월 3일 대구에서 '전국노래자랑' 첫 녹화를 시작한 뒤 꼬박 1년. 이달 평균 시청률은 5.0%(닐슨코리아 기준)으로 송해가 생전에 마지막에 출연했던 2022년 5월 15일 방송 시청률이 4.4%인 것을 고려하면 비교적 선방하고 있다. '일요일의 막내딸'은 그렇게 한 뼘 더 자라고 있었다. 김신영을 최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만났다.

김신영이 KBS1 '전국노래자랑' 녹화에서 관객과 손을 마주하며 인사하고 있다. KBS 제공

김신영이 KBS1 '전국노래자랑' 녹화에서 관객과 손을 마주하며 인사하고 있다. KBS 제공


"시장가서 내복 사 입고" 달라진 김신영

_계은숙의 '노래하며 춤추며'는 태어나기 전에 나왔던 노래인데 어떻게 알았나.

"아버지가 음악을 굉장히 좋아하셨다. 어려서부터 트윈폴리오나 록밴드 마그마의 음악을 듣고 자랐다. 할머니 손에 자라면서 할머니가 김상국의 '쥐구멍에도 볕 들 날 있다'(1965) 같은 옛 노래도 불러줬고."(웃음)

_다친 오른쪽 어깨는 괜찮나.

(김신영은 지난 2월 강원 철원군에서 진행된 녹화에서 여자 중학생 유도부 출연자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엎어치기를 당했다가 어깨를 다쳤다. 그 이후 한동안 팔 보호대를 차고 활동했다.)

"많이 나아졌다. 회복까지 6개월 걸렸다. 녹화장에서 번쩍 들려 넘어간 뒤 아파 뼈에 문제가 생긴건가 했는데 인대 30%가 파열됐다더라. 중학생 때 잠깐 유도를 배우긴 했지만 다 까먹은 상황이었으니까. '전국노래자랑' 출연이 평생의 소원인 분들도 있어 녹화는 끝까지 마치고 병원에 갔다. 오른팔에 깁스를 한 채 녹화하면서 방청객들께 "여러분이 제 오른팔이 돼달라"고 부탁드렸는데 그때마다 힘을 주셨다."

_벌써 1년이다.

"전국으로 녹화하러 다니다 보니 이제 봄, 가을볕이 무섭다는 걸 알게 됐다. 3월에 부산 야외에서 녹화했는데 뻥 뚫린 곳이라 춥더라. 그때 시장에 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복을 사 입었다. 그렇게 계절을 새로 느낀다. 너무 추울 때는 녹화를 못하니 9월엔 매주 두 번씩 녹화를 뛴다. 마음이 급해 (겨울을 앞둔) 농사꾼의 마음이 되더라."

_주로 야외 녹화라 돌발상황이 많을 것 같다.

"서울 도봉구 녹화(10일 방송) 땐 비가 갑자기 엄청나게 오는 걸 넘어 벼락까지 쳤다. 악단 키보드 한 대가 고장 났다. 그렇다고 바로 철수할 순 없잖나. 현장에 한두 분이라도 오셨다면 어떻게든 버텨봐야 하니까. 나도 참가자도 마이크에 수건 덮어 노래 불렀다. 오신 분들께는 비 피할 모자 드리고 그러면서 분위기 좀 띄우려고 '남행열차'를 부르는데 정말 거짓말처럼 해가 쨍하고 뜨더라. 관객분들께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이게 '전국노래자랑'입니다. 비가 오고 벼락이 쳐도 우리 같이 노래 부르고 있으면 해가 뜹니다'."

_촬영에 익숙하지 않는 시민들이 출연해 생기는 해프닝도 적잖을 텐데.

"무대에 올라 노래 부르시다가 중간에 내려가는 분도, 리허설 때 가사 틀려 자신 없다고 아예 가시는 분도 있다. '왜 난 인터뷰가 없냐' 서운해하는 분도 있고. 그러면 '인터뷰 신경 쓰면 '땡' 맞습니다. 인터뷰가 아니라 노래하러 나오셨잖아요?'라고 달랜다."


"출연자분들이 점점 내 눈을 본다"

김신영이 최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를 찾아 기념 촬영을 하며 "전국~"을 외치고 있다. 안다은 인턴기자

김신영이 최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를 찾아 기념 촬영을 하며 "전국~"을 외치고 있다. 안다은 인턴기자

_첫 녹화 때 "전국~" 할 때 굉장히 떨린다고 했다. 아직도 그런가.

"적응 중이다. 30년 넘게 하신 분(송해)을 어떻게 따라가겠나. (송해와) 비교하는 말도 듣고 있다. 시작하면 무엇이든 10년을 본다.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정오의 희망곡'도 맡은 지 10년이 넘었다. 많은 분이 '김신영이 원하는 '전국노래자랑' 색깔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하지만 '내 색깔을 왜 전국노래자랑에서 내야 하나' 싶다. 이 프로그램은 내가 아니라 시민이 주인공이다. 그렇게 1년을 맞았더니 이제 참가자분들이 점점 내 눈을 보고 얘기한다. 믿음이 생긴 건가 싶기도 하다. 장염 걸리고 지난 크리스마스 때였나, 녹화하는데 방청객이 '김신영 파이팅' 이렇게 외쳐줘 참 눈물 나게 감사했다."

김신영이 3월 방송된 '전국노래자랑'에서 30년 동안 광부로 일한 출연자의 사연을 듣고 울고 있다. KBS 방송 캡처

김신영이 3월 방송된 '전국노래자랑'에서 30년 동안 광부로 일한 출연자의 사연을 듣고 울고 있다. KBS 방송 캡처

_30년 동안 광부로 일한 출연자가 방청석에 있는 아내를 보고 "고맙다"고 하는데 또 울더라.

"녹화장에 태백의 '마지막 광부'라고 하는 분들이 오셨는데 '얼마나 고생 많으셨을까' 싶었다. 아버지랑 비슷한 연배인데 손을 덜덜 떨면서 '그동안 뒷바라지 너무 잘해주고 나 버리지 않고 살아줘 고맙다'고 하는데 정말 눈물이 터져 나왔다. 굉장히 현실적이라 잘 울지 않고 영화 보면서도 운 적이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전국노래자랑' 무대에 서면 운다. 언젠가는 할아버지가 자꾸 노래를 틀리자 함께 나온 손녀가 그걸 다 맞춰가며 바이올린 연주하는 걸 보고 울었다. '손녀가 커 이제 할아버지께 맞춰주고 나중에 이 무대로 할아버지를 추억하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작 할아버지와 손녀는 안 우는데 그걸 방청석에서 지켜보는 몇몇 분이 우시더라. 손녀와 할아버지를 보며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 생각이 났다. 할머니 손에 커 할아버지 할머니가 내겐 눈물 버튼이다."


김신영이 '연탄'으로 소통하는 법

김신영은 코미디프로그램 '웃찾사' 코너 '행님아'에서 2004년 소년을 연기했다. SBS 방송 캡처

김신영은 코미디프로그램 '웃찾사' 코너 '행님아'에서 2004년 소년을 연기했다. SBS 방송 캡처

김신영은 이사만 60번 넘게 다녔다. 초등학교 2학년 1학기 때 전학 간 횟수만 8번. 아버지 사업이 기울면서 비닐하우스에서도 살았고, 폭우로 살던 판잣집의 지붕이 날아가 장롱에 들어가 잔 적도 있다. "옛날엔 아빠가 너무 원망스러웠죠. 태어난 나도 밉고". 지독했던 가난은 '뼈그우먼(뼛속까지 개그우먼)'에게 전화위복으로 작용했다. 목포에 사는 외할머니에게 맡겨진 소녀는 전라도 사투리를 익혔고, 청도 할머니댁에서 지낼 땐 경상도 사투리를 배웠다. "이 환경 덕분에" 그는 구수한 사투리로 노인 캐릭터를 실감 나게 표현했다. "이젠 아버지 탓 안 해요. 이런저런 조건들이 다 제게 온 자양분 같아요. 누가 그렇게 살아 봤겠어요." 결핍은 그에게 공감의 밑거름이었다.

_'전국노래자랑'에서 출연자가 연탄을 들고 나오니 어려서 "연탄 갖고 눈사람 많이 만들었다"고 맞받더라. '연탄 세대'는 아닌 거 같은데.

"한 지붕 밑에 네 가족이 살았는데 집마다 따로 연탄을 땠다. 연탄 한쪽이 하얗게 변하면 타지 않은 쪽으로 거꾸로 돌려 다시 쓰고. 직접 갈아보기도 하고 눈 내리면 비탈길에 다 탄 연탄 부수고. 어릴 땐 기름보일러는 부잣집에서나 썼다."(웃음)

_산전수전을 겪어 누군가의 그늘이 더 잘 보이는 것 같다.

"'전국노래자랑'에 요즘 아이들이 많이 나온다. 엄마 아빠 없이 할머니랑 나오는 애들 보면 더 잘해주려 한다. 쪼그라든 애들이 있다. 할머니가 땀 닦아주고 그러는데 그땐 그게 진짜 사랑인 걸 모르니까. 그러면 애한테 다가가 '네 할머니 진짜 멋있다. 할머니랑 같이 왔구나, 짱이다'라고 말한다. 할머니껜 '나중에 얘가 집안 살리겠는데요?'라고 하고."


김신영이 '전국~' 촬영 전 은행 들른 이유

김신영이 '전국노래자랑'에 출연한 초등학교 4학년 학생에게 용돈을 쥐어주고 있다. KBS 방송 캡처

김신영이 '전국노래자랑'에 출연한 초등학교 4학년 학생에게 용돈을 쥐어주고 있다. KBS 방송 캡처

_아이들 용돈도 자주 주더라. 녹화 전 현금을 따로 준비하나.

"은행 가서 만 원권 50개, 5만 원권 10개씩 100만 원을 미리 찾아놓는다. 그러면 삼촌('전국노래자랑' 악단 멤버들과 작곡가 등)들이 '야 우리도 돈 있어. 우리한테 돈도 뜯고 해' 하신다. 처음엔 그렇게 못했다. 성격상 누구한테 피해 주거나 부탁하는 걸 못 한다. 그렇게 녹화하면서 '이렇게 더불어 사는 거지'를 배운다. 그런데 방송사 국장급 제작진이 '신영아 이제 아이들한테 돈 그만 줘라' 하더라. '아이들한테 돈 정말 어렵게 버는 걸 가르쳐 줄 필요도 있다'면서. 이젠 사탕을 준다. 아이 부모님께 사탕 줘도 되냐고 먼저 물어보고."

_'전국노래자랑' 악단 멤버들을 삼촌이라고 부르나.

"'전국노래자랑' 들어가고 얼마 안 돼 악단 삼촌이 돌아가셨다. 악단장님이 '신영이한테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고 하는데 부고 소식 듣고 바로 빈소를 찾았다. '전국노래자랑'은 한 팀이고 모두 가족이다. 악단에 나랑 동갑내기 여성 키보드 연주자가 들어왔다. 1년 동안 '전국노래자랑'을 하면서 스스로 푸근해진 걸 느낀다. 빡빡하고 공감을 잘 못하는 성격이었는데 코미디에 대한 생각도 변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다."


"웃을 수 없는 환경이었지만 웃음 보고 싶어"

SBS 웃찾사 '행님아', '단무지아카데미' 등에 출연해 인기를 얻은 김신영의 2015년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SBS 웃찾사 '행님아', '단무지아카데미' 등에 출연해 인기를 얻은 김신영의 2015년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_힘들게 자랐는데 어떻게 코미디언이 될 생각을 했나.

"데뷔 초 코미디언 동기들이 그랬다. '저 감정 없는 애가 어떻게 코미디언이 됐을까'라고(김신영의 MBTI는 INTJ다. '로봇 같다'는 말을 듣는 유형이다). 난 잘 안 웃지만, 사람들이 웃는 게 좋았다. '와, 신영이 되게 웃겨'라며 나한테 모이는 친구들이 고마웠고, 웃을 수 없는 환경에서 웃음을 계속 보고 싶었다. 외로움과 결핍을 채워준 게 이 직업이었다."

_내가 힘들면 남이 안 보이는데.

"초등학교 때 육성회비를 제때 못내 종종 학교에 안 갔다. 육성회비 안 내면 방송으로 이름 부르고 그래서 너무 창피했으니까. 학교 안 가고 간 곳이 어디었겠나. 시장이고 복덕방이었다. 복덕방 아줌마들은 물을 많이 줬다. 가서 기웃거리며 거기서 아줌마들 했던 얘기들 듣고 그랬는데, 그게 다 내 재산이 되더라."

김신영은 "내게 살은 통한이었다"고 말했다. KBS '빼고파' 영상 캡처

김신영은 "내게 살은 통한이었다"고 말했다. KBS '빼고파' 영상 캡처

_그렇게 힘들었던 가난을 지우려 살을 뺐다.

"포동포동해서 잘나갈 때 살 빼는 걸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살 빼면 캐릭터 없어진다고 회사에서도 반대했다. 다들 살 빼면 망한다고 해 정말 외롭게 살을 뺐다. 그런데 내게 살은 통한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중2 때까지 엄마, 아빠, 오빠 가족 모두 떨어져 살았다. 그땐 동네 아줌마들이 밥을 (비닐) 봉지에 넣어주곤 했다. 햄버거 하나로 이틀을 버텼던 때라 (먹을 게 주어지면)폭식했다. 오늘 먹지 않으면 내일 죽을 거 같았으니까."

※김신영②로 이어집니다. 두 번째 기사는 29일 오전 9시에 공개됩니다.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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