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기사
대학만 보고 질주하는 영재학교엔, 조기입학 어린 영재 설 자리가 없다
이미 가입된 회원입니다.
만 14세 이상만 회원으로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천재 신화’에 열광하죠. 뉴스엔 IQ가 200에 가깝고 초등학교도 가기 전 미적분을 푼다는 어린 영재들이 월반을 거듭해 빨리 대학에 입학했다는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하지만 이들이 뛰어난 학자로 자라났다는 해피엔딩을 접하긴 어렵습니다. 이 나라에서 어린 영재들이 언제나 좌절하고야 마는 이유는 뭘까요? 영재를 키우지 못하는 한국의 영재교육, 우리에겐 왜 항상 새드엔딩만이 익숙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한국일보가 한국 영재교육의 현주소를 들여다봤습니다.
"영재학교에서 칼텍(캘리포니아 공대)이나 스탠포드 붙는 애들이 있어요. 근데 이 아이들이 서울대나 카이스트에 떨어지면, 부모님들은 또 섭섭해 하죠. 해외 명문대가 좋다지만, 한국에선 여전히 '국내 간판'이 중요하니까요. 아무리 영재라도 국내 대학을 우선순위에 두니, 한국 입시를 준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일보 인터뷰에 응한 영재고 교장은 결국엔 '대학입시'란 거대한 수레바퀴를 피해갈 수 없는 한국 영재교육의 현실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 영재고는 대입에 매몰된 교육 환경을 탈피하기 위해, 대학처럼 학점제를 도입했다고 한다. 과목마다 실험과 구술을 기반으로 절대평가를 해서, 학생들을 상대평가로 줄세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성과를 평가하고자 하는 취지였다.
그러나 이런 절대평가 학점제마저 엄혹한 입시 현실을 뚫어낼 순 없었다. 결국 이 역시도 학생의 성과가 4.5점 또는 4.3점 만점 기준의 숫자(학점)로 드러나기에, 영재 학생들 또한 학교 점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한다. 이 교장은 "서울대나 카이스트 모두 보통 1차 서류전형에서는 학점에 의해 걸러진다"며 "학교 입장에선 최대한 영재 교육 취지를 살리고 싶지만, 한국에서 대입을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만 10세에 영재학교인 서울과학고에 입학했다가 6개월만에 자퇴를 결정한 백강현 군 논란을 계기로, 한국의 영재교육 시스템을 재점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개별 학생의 능력과 소질을 중시하는 영재교육에선 원칙적으로 조기진급(월반)이나 조기입학이 자유로워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어린 학생이 상급학교에 적응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러나 백군 측이 '괴롭힘'을 자퇴 이유로 밝혔던 것처럼, 지금 영재학교의 현실은 '어린 천재'가 동급생인 '형·누나·언니·오빠'의 틈바구니에서 버티도록 하는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대학 간판을 향해 앞만 보고 달리는 영재고의 치열한 경쟁 속에선, 영재 나이가 어리다고 배려하고 챙겨주는 '깍두기 문화'는 구조적으로 존재할 수가 없다.
어린 천재의 시련기는 백강현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전국 8개 영재학교에선 부적응 등의 문제로 중도이탈하는 조기입학자가 매년 나오고 있다. 한국의 어린 천재들은 왜 이처럼 언제나 좌절하고 마는 것일까? 본보는 영재학교 재학생과 졸업생 14명, 다수의 영재교 교원들과의 심층 인터뷰를 통해 그 이유를 짚어봤다.
지능지수(IQ) 204에 달한 2012년생 백강현군은 2016년 SBS ‘영재발굴단’ 출연 당시 수학과 음악에서 뛰어난 재능을 드러내면서 큰 화제를 모았다. 초등학교에 입학 이듬해 5학년으로 조기 진급한 뒤 지난해 4월 중학교에 입학했다. 올해 3월에는 서울과학고에 입학했다.
그러나 서울과학고에 입학한 지 6개월이 채 안된 시점인 8월 학교를 자퇴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백군 아버지는 "버티지 못하면 나가라는 식으로 시스템만 강조한다면 애초에 열 살 아이를 왜 선발했냐"며 "이렇게 대책도 없이 버리면 한 아이의 장래는 어떡하나"라는 내용의 입장문을 올렸다.
백군이 같은 학급 학생들로부터 언어 폭력에 시달렸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백씨는 "가해자들이 '(백군이) 이 학교에 있는 것은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이라는 얘기를 일주일에 2, 3번씩 지속적으로 했다"며 "조별 과제를 할 때면 '강현이가 있으면 한 사람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그 조는 망했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영재교육은 규모로만 보면 세계적인 수준이다. 영재교육진흥법에 따라 운영되는 영재교육 기관은 영재학교 8개, 영재교육원 340개, 영재학급 1,118개 등 총 1,466개다. 법에 명시되진 않았지만 통상 영재교육 기관 집계에 들어가는 일반 과학고도 20군데나 된다. 이 모든 기관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지난해 기준 7만2,518명에 달한다. 전체 초중고생의 1.4%가 영재교육을 받고 있는 셈이다.
조기입학을 허용하는 영재학교엔 또래들보다 먼저 입학한 나이 어린 학생들 수도 적지 않다. 올해 기준 고등교육 기관인 영재고에 중학교 1·2학년 때 조기입학한 학생은 전체 학생의 7.6%인 59명이다. 이 중 백군은 조기입학생 중에서도 나이가 굉장히 어린 편으로, 지난해 만 9세로 중학교를 조기 졸업하고 올해 영재고 중 하나인 서울과학고에 입학했다.
제도권 영재교육에 적응하지 못한 어린 천재들의 현실은 통계에서도 잘 드러난다. 신현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교육부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3년부터 올해까지 10년 간 영재고에 조기입학한 학생 584명 중 17명(2.9%)이 학교를 중도 이탈했다. 나이에 맞춰 제때 영재고에 입학한 학생들의 중도 포기 비율 1.8%(8,096명 중 146명)에 비해 유의미하게 높은 수준이다.
영재별 개인 특성이 다양하고 영재학교별 상황도 전차만별이라, 조기입학자들의 자퇴·전출 원인을 하나로 딱 잘라 말하긴 어렵다. 대부분의 영재고가 기숙 형태여서 어린 학생들의 독립 및 적응이 쉽지 않을 수 있다는 점 등도 이유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본보 인터뷰에 응한 다수 재학생과 졸업생은 '대학 입시와의 연관성'을 배제하긴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학점제와 절대평가제를 도입해 일반고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경쟁은 없지만, 물밑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탓에 백군처럼 나이 어린 동급생들이 상처를 입을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다.
경기과학고(영재고) 졸업생 A씨는 "영재고에서도 알게 모르게 누가 서울대 가냐를 두고 끊임없는 경쟁을 한다"며 "어릴 때부터 영재 교육을 받은 만큼 부모들의 대학 간판 기대도 커 무시할 수 없는 문제"라고 말했다. 지역 영재고 졸업생 B씨는 "학교에서도 '입시 결과가 평판과 직결되니 신경을 쓰라'고 한다"고 털어놨다.
영재고 학생들이 입시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또 있다. 학생들은 스스로 커리큘럼을 짜고 연구과제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등, 일반 고등학교와 다른 교육 과정을 거친다. 주요 과목이 고정된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준비하는 식이 아니기 때문에, 대다수가 대학 입시에서 정시보다는 수시 전형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수시 특성상 교내 성적 경쟁이 불가피한데 영재고 안엔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수재들만 있어 감당해야 할 부담감이 상당하다는 점이다. 한국과학영재학교 졸업생 C씨는 "학점제를 운영해도 본인 관심 분야가 아닌 '학점 잘 주는 선생님'만 찾아다니는 학생들도 있다"고 털어놓았고, 서울과학고 재학생 D군 역시 "내신경쟁이 치열해 뒤처지지 않으려 주말에 학원을 다닌다"고 전했다.
이렇게 치열한 분위기 속에서, 학교와 사회 경험이 부족한 '어린 천재'들은 때때로 골칫거리 취급을 받게 된다고 한다. 한국과학영재학교 졸업생 E씨는 "학점 하나하나가 중요한데 나이 차가 많은 학생이 같은 조에 끼어 있으면 멈칫할 수 있다"며 "머리가 좋거나 공부를 잘하는 것을 떠나서 협동 과제 수행 능력이나 소통 능력에서 차이가 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서울과학고 2학년에 재학 중인 F군도 "1년 먼저 조기입학한 아이와도 소통 과정에서 갈등이 있는데, (백군처럼) 5살 차이 나는 학생과 조별과제를 하는 건 오죽했겠냐"고 말했다.
이런 부작용을 막기 위해 어린 영재들의 소통 능력 등 성장을 돕는 프로그램이 절실하지만, 이런 데까지 세심하게 신경 쓰는 영재학교는 거의 없다. 대학 입시에 대한 구성원들의 기대와 요구가 있다 보니 영재학교도 맞춤형 교육을 진행하기보단 '3년 교육→ 대학입학'이라는 일괄적인 과정에 집중하게 된다. 류지영 카이스트 과학영재교육연구원 영재정책센터장은 "어린 영재들은 지적 능력은 뛰어나지만 정서 발달은 또래보다 느린 '비동시성'을 겪는다"며 "영재교육기관이라면 개별화된 교육프로그램과 정서 교육을 동반해야 하는데 그게 마련되지 않다 보니 조기입학자들의 부적응에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백강현 군 사태를 두고 "영재교육이 본격화 된 후 10여 년간 드러나지 않았던 영재학교의 문제가 노출됐다"고 지적했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육학과 교수는 "박탈감에 쉽게 노출되는 어린 영재들을 위해 멘토링 프로그램을 의무화해야 한다"며 "동급생을 멘토로 짝 지어준 뒤 함께 학교 생활 적응할 수 있도록 하거나 영재교육 전문가를 1대1로 매칭해 지속 관리를 받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조상식 동국대 교육학과 교수는 "비교과 프로그램에 대한 전담 교원을 배치해 영재 학생들에게 대인관계 기술과 소통 능력을 길러줄 필요도 있다"고 짚었다.
영재학교 출신들의 대학 입시 부담을 덜어줄 제도 개선의 필요성도 제기됐다. 양정호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학생들이 느끼는 직간접적 성적 압박을 줄여야 대입과의 연결고리도 끊을 수 있다"며 "대학에서 성적보다 개별 학생의 특화된 면을 볼 수 있도록 학교생활기록부 글자수 제한을 완화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송인섭 전 한국영재교육학회장도 "대학부터 개별 학생들의 성적 반영 비중을 줄이고 학생들이 대학과 어떻게 연계해 성장할 수 있을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며 "영재학교에 영재교육 전문가로 이뤄진 위원회를 신설해 교육방향이 바르게 나아갈 수 있도록 중심을 잡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해주세요.
작성하신 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로그인 한 후 이용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구독을 취소하시겠습니까?
해당 컨텐츠를 구독/취소 하실수 없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