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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주고 떠난 ‘봉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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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노숙자 행색의 부녀가 한강변 매점을 찾는다. 아빠(윤제문)는 달걀 꾸러미를 고른 딸(정인선)에게 “삶은 달걀이 물에 뜨는 거 아냐”라고 묻는다. 매점 주인(변희봉)이 20년 매점 운영하면서 처음 듣는 소리라고 끼어든다. 아빠는 주인과 내기를 한다. 과연 달걀은 떠오를까. 봉준호 감독의 6분짜리 단편영화 ‘싱크 앤 라이즈’(2003)는 관객 1,300만 명을 모은 ‘괴물’(2006)의 전주곡 같다. 당시 61세 노장 배우 변희봉은 단편에서조차 봉 감독의 생각을 대변한다.
□ 지난 18일 세상을 떠난 변희봉은 봉 감독 영화에 가장 많이 출연한 배우 중 한 명이다. 봉 감독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 출연이 시작이었다. ‘살인의 추억’(2003)에서 형사반장 구희봉을 연기했고, ‘괴물’에선 한강변 매점을 운영하는 박희봉으로 출연했다. ‘옥자’(2017)에선 손녀와 슈퍼돼지를 키우는 촌로 주희봉으로 등장했다. 구수한 말투와 곰살맞은 표정이 일품인 연기들이었다. 배우 송강호가 ‘봉준호 월드’를 이끈 주연이었다면, 변희봉은 숨은 조연이었다.
□ 1965년 MBC 성우로 데뷔한 변희봉은 연기 인생 대부분을 방송국에서 보냈다. ‘플란다스의 개’ 이전까지 영화 출연작은 ‘여자세상’(1988) 한 편에 불과했다. 그는 주로 악역을 연기했다.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설중매’(1984)에선 유자광을 연기하며 “내 손안에 있소이다”라는 대사를 유행시키기도 했다. 그는 봉 감독이 처음 영화 출연 제안을 했을 때 단칼에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플란다스의 개’ 이후 그의 활동 무대는 영화로 확장됐다. ‘양자물리학’(2019)까지 19편에 더 출연했다.
□ 봉 감독이 스크린에 모신 탤런트는 변희봉과 김혜자 단둘이다. 김혜자는 안방극장을 쥐락펴락했던 스타다. 반면 변희봉은 인상 강한 조연 역할이 대부분이었다. 그가 ‘옥자’로 칸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은 후 “고목나무에 꽃이 핀 기분”이라는 소감을 밝힌 이유 중 하나이리라. 희봉(希峰)은 예명(본명은 인철)이다. ‘희망의 봉우리’ 또는 ‘봉우리를 희망한다’로 해석할 수 있는 이름이다. 그는 적어도 조연급 노장 배우들에게 연기는 인생 후반에도 만개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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