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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집토끼엔 새 집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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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른바 ‘집토끼’였다. 투표권이 생긴 이후 선거에서 기권한 적은 있어도 지지 정당을 바꾼 경우는 많지 않다. 몇 차례 다른 선택을 했지만, 그 정당 역시 성향이 비슷한 ‘범OO 진영’으로 분류됐기 때문에 ‘갈아타기’라고 할 순 없겠다.
투표 이력만 보면 특정 정당의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분류되겠으나, 지금은 지지 정당이 사라진 ‘정치적 노숙인’에 가깝다. 30년 넘게 표를 몰아준 정당은 그들이 당초 내세운 가치·신념·원칙은 물론, 내가 가진 상식과도 어긋나고 있다. 그들과 대립·경쟁하는 정당을 대안으로 삼을 수도 있겠지만, 그 정당 역시 표방한 정체성과 다른 길을 간다. 상식적이지 않은 건 매한가지다.
우리 정치는 외견상 보수-진보 양당 구조이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어떻게 다르고, 그들의 원칙대로 정치 행위가 이뤄지는지 현실에서 느끼긴 쉽지 않다. 자유·경쟁을 중시한다는 보수정당이 집권했으나 현 정부는 시장 자율을 외치면서도 금융사와 민영화한 통신기업 인사 개입을 시도해 논란이 됐다. “정부가 물가를 통제하는 시대는 지났다”더니 기업들을 압박해 가격 통제에 나서기도 했다.
진보 성향 이전 정부도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를 내세웠지만 말과 행동이 달랐다. 기득권자들의 ‘내로남불’식 행태로 '공정 평등 정의'는 조롱거리가 됐고, 진보 성향 정치인들이 더 도덕적이거나 덜 부패하지도 않다는 게 사실로 드러났다.
정체성을 지키지 못하는 두 정치 세력은 번갈아 집권하면서 ‘몰상식’한 점에선 놀랍도록 빠르게 닮아가고 있다. 양쪽 모두 같은 사안을 놓고도 여당일 때와 야당일 때 입장이 달라지며, 그들의 말 바꾸기는 일상이 됐다.
정당들이 표를 얻기 위해 ‘선의의 경쟁’보다 마치 ‘누가 더 비상식적인지’ 겨루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부정적 당파성' 때문이다. 미국의 정치평론가 에즈라 클라인은 ‘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는가’라는 책에서 이 개념을 설명한다. “우리는 특정 정당을 더욱 일관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는데, 우리가 투표하는 정당을 더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편 정당을 더 싫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클라인은 ‘상대가 당선되면 안 된다’는 열정으로 뭉치는 유권자들의 '정치적 정체성'을 정당들이 이용한다고 분석했다. 그래서 정당의 선거 전략이 무당파·부동층을 설득하는 것보다 지지 기반의 결집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정당들의 팬덤 정치와도 연결된다. 상대 정치인(정당)의 실패와 몰락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 편의 잘못은 무엇이든 정당화되고 용인되는 분위기. 극성 지지층을 결집시키기 위해 상대 진영을 적으로 규정하고 혐오와 증오를 쏟아내는 정치인들의 입···.
개인의 정치적 견해는 다양하고 정책을 바라보는 시각도 ‘흑과 백’처럼 단순하지 않은데, 선거에 실질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선택지는 그닥 매력적이지 않은 ‘두 곳’으로 제한돼 있다. 마이클 포터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저서 ‘권력의 배신’에서 “현대 미국 정치는 규제 없이 민주당과 공화당이 스스로 경쟁 규칙을 정하는 유일한 산업”이라며 “이런 시스템은 공공의 이익과 거리가 멀다”고 했다. 이는 우리 정치 시스템에도 해당되는 지적이다.
이젠 거대 양당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소선구제 등 선거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바뀔 때가 된 것 같다. 다양한 생각을 가진 정당들이 의회에 진출해야 정치의 양극화도 완화되고, 거대 정당도 무당·중도층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경쟁자가 많아지면 정체성과 상식에 입각한 정책이 나올 거라 생각한다. 그래야 마음 줄 곳 잃은 무당·중도층도 선택지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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