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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마 돈나가 빚는 오페라 개연성… 여지원의 '노르마'가 기대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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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공연 기획과 음악에 대한 글쓰기를 해 온 이지영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이 클래식 음악 무대 옆에서의 경험과 무대 밑에서 느꼈던 감정을 독자 여러분에게 친구처럼 편안하게 전합니다.
요즘 드라마 '무빙'에 푹 빠져 있다. 비현실적 설정이지만 작품성을 인정받은 스토리를 뛰어난 연출과 기술, 훌륭한 연기로 개연성 있는 드라마로 몰입감 있게 구현해 낸 작품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이렇게 좋은 콘텐츠가 쏟아지는 때에 한국 오페라가 고민해야 할 부분이 바로 '개연성 있는 드라마 구현'일 것이다. 대부분의 오페라는 현실과 거리감이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회적, 문화적 배경도 다른 먼 나라, 먼 시대 인물의 이야기들은 오페라를 자칫 고루한 예술로 인식하게 만든다. 하지만 시대가 지나도 언제든 소통하는 것이 고전의 매력이다. 따라서 이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는다면 요즘처럼 볼거리 많은 시대에 오페라는 지금보다 더 정체되고 고립될 수 있다.
올 하반기 오페라 라인업을 보면서 앞서 말한 '개연성 있는 드라마 구현'에 대한 기대감을 가져도 좋지 않을까 싶다. 특히 '라 트라비아타' 비올레타 역에 박소영, '노르마'의 노르마 역에 여지원, '투란도트'의 칼라프 왕자 역에 이용훈, 투란도트 역 이윤정, 류 역 서선영 등 캐스팅 면면에서 좋은 작품을 기대하는 간절한 바람이 생겼다. 유명 성악가 한두 명의 출연이 작품 전체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각 역할에 적합한 뛰어난 인물들이 캐스팅됐기 때문이다. 캐스팅은 드라마만큼이나 오페라에도 중요하다. 단순히 연기를 잘한다, 노래를 잘한다는 사실보다는 그 배역을 소화하는 데 총체적으로 적합한 인물이 작품의 진가를 알리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한다.
벨리니의 '노르마'는 명작이지만 쉽게 무대에 올리지 못했던 작품이다. 벨리니는 유로 화폐 통합 이전 이탈리아 지폐에 등장한 유일한 작곡가였고, '노르마'는 유일한 오페라였다. 음악의 나라 이탈리아에서 벨리니와 '노르마'가 어떤 입지에 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노르마'는 성악가에게 긴 호흡과 어려운 기교를 요한다. 여기에 신권을 갖는 '사제'라는 캐릭터의 위엄, 금지된 사랑과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한 극적인 반전 등 음악과 드라마 전체를 이끌고 가야 하는 캐릭터의 무게감을 감당해 낼 인물이 있을 때에만 빛을 발할 수 있는 작품이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는 마리아 칼라스의 위대함을 꼽을 때, '노르마'는 빠지지 않는다. 칼라스는 단순한 소프라노가 아니었다. 드라마틱한 에너지와 콜로라투라의 기교까지 갖춘 음역대가 넓은 가수였고 거칠고 묵직한 음색으로 극한의 에너지를 끌어다 쓸 때 폭발시키는 힘, 기식까지 토해 내며 분노와 슬픔을 절절하게 연기하는 살아있는 호흡, 거대한 프레이징 안에서 실제 인물처럼 몰입해 드라마를 조율해 내는 능력은 ‘노르마’에서 절정을 이뤘다. 아니, 칼라스는 다른 많은 작품에서도 충분히 훌륭했지만 성악가에게 많은 역할을 기대하는 벨칸토 오페라의 대표작 '노르마'는 칼라스가 아니면 안 됐던 것이다. 작품의 재평가가 이뤄지자, 이후 '노르마'는 개성과 능력을 갖춘 소프라노들이 감히 도전하고 싶은 레퍼토리가 됐다.
2013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최대 화제작이었던 체칠리아 바르톨리와 조수미의 '노르마'(DECCA)는 그중에서도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원래 노르마 역은 소프라노가, 연적이었던 아달지자 역은 메조소프라노가 노래한다. 그런데 바르톨리는 이야기 전개상 원숙한 캐릭터인 노르마는 카리스마 넘치는 음색의 메조소프라노가, 어린 제사장 아달지자는 여린 목소리의 소프라노가 어울릴 것이라는 발상에서 출발해, 벨리니 자료를 바탕으로 고증을 거친 후 두 배역을 서로 바꿔 부르게 했다. 로마 산타체칠리아 음악원 시절부터 단짝이었던 두 성악가는 작은 음량이 약점일 수 있었지만 조반니 안토니니가 이끄는 시대악기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하면서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칼라스의 위엄과 같은 선상에 둘 수 없는 전혀 다른 해석이었는데, 벨리니가 사람의 목소리가 갖고 있는 힘과 기교를 어디까지 활용해 곡을 썼는지 세밀하게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기록이 된 것이다.
벨리니 이후 베르디와 푸치니가 등장하고, 바그너에 이르면 사람의 목소리보다 관현악의 역할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확장된다. 대부분의 청중은 벨리니와 바그너 그 중간 지점의 작품들을 더 즐기고 있다. 다음 달 무대에 오르는 '투란도트'에서 테너 이용훈이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부를 때 엄청난 박수가 터져 나올 것이고, 소프라노 서선영이 '류'의 마지막 아리아를 부를 때면 여지없이 눈물이 흐를 것이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공연될 쉽게 만날 수 없었던 벨칸토 시대의 명작, 소프라노 여지원의 '노르마'에도 큰 설렘과 기대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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