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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잡 시위 1년, 이란은 '다른 나라'가 됐다..."아무리 짓밟아도 되돌아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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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됐다 의문사한 이란 여성 마흐사 아미니(사망 당시 22세)는 '히잡 혁명'의 작은 불꽃이 됐다. 아미니 사망 1주기인 16일(현지시간) 이란 정부의 무자비한 단속에도 "여성, 생명, 자유!" "독재자에게 죽음을!" 구호가 곳곳에서 울렸다. 아무리 짓밟아도 아미니 사망 이전으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이들이 목숨을 걸고 다시 거리로 나온 것이다.
정부는 추모마저 가로막았다. 아미니의 아버지 암자드는 딸의 기일에 보안군에 체포됐다 풀려났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가택 연금된 상태라고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둔 이란인권센터(CHRI)는 전했다. 정부는 이란 서부 쿠르디스탄주(州) 사케즈에 있는 아미니 묘지에 대한 접근도 철저히 막았다. 추모 열기가 대규모 반정부 시위의 불씨를 댕길까 우려한 탓이다.
아미니 유가족이 추모식 개최를 예고하자 정부는 암자드를 최근 2주간 네 차례나 소환했고 아미니의 삼촌 사파 아엘리를 이유 없이 잡아 가뒀다. 아미니 묘지 주변에는 대규모 경찰과 군 병력이 배치됐고 헬리콥터까지 떴다.
그럼에도 저항을 틀어막진 못했다. 이란인권센터는 16일 "아미니 묘지 근처에서 27세 파딘 자파리가 보안군이 쏜 총에 머리를 맞고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밝혔다. 인터넷 연결이 차단됐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수도 테헤란 등에서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을 향해 최루탄이 발포되는 동영상이 올라왔다. 라히잔, 케르만샤, 사난다지, 마슈하드, 시라즈, 이스파한, 부칸, 이제, 라슈트 등 다른 지역에서도 시위가 잇따랐다.
하디 가에미 이란인권센터 국장은 "신정 정권이 군을 배치하고 활동가와 유가족을 구금·협박하는 것은 국민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강경 진압이 이란인들의 변화에 대한 열망을 자극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미니의 죽음은 이슬람 성직자가 종신 집권하는 이슬람공화국에 변혁의 물길을 냈다. '히잡 시위'의 최종 목적은 복장의 자유가 아니다.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이다.
히잡은 이란에서 정치적으로 변질됐다. 세속화를 추진한 옛 팔레비 독재 왕조는 히잡을 구습으로 규정하고 착용을 금지했다. 당시 독재 왕정에 저항하는 의미로 여성들이 일부러 히잡을 쓰기도 했다.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왕조를 무너뜨리고 들어선 이슬람공화국은 히잡을 차별과 억압의 도구로 이용했다. 이란의 국부 호메이니는 1983년 모든 여성에게 히잡 착용을 강제했다. 일부 여성들이 저항했지만 힘이 없었다.
이번 히잡 시위는 달랐다. 젊은 여성들이 똘똘 뭉쳐 주도했다. 일부 젊은 남성들도 동조했다.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세예드 알리 하메네이(84)에 대한 비토였다. 이란은 인구의 60% 이상이 30세 미만이어서 청년층 결집의 위력이 컸다. 시위는 지역과 계층을 불문하고 확산됐고 쿠르드족 등 소수민족까지 동참했다. 고국의 상황을 외면해왔던 이란 디아스포라들도 연대했다.
히잡을 쓰지 않고 운전을 하다 3차례 적발돼 차량 압수 위기에 처한 바하레(32)는 "'히잡 강제 반대'는 지난 43년간 억압에 대한 시민 불복종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며 "정부가 아무리 탄압해도 저항은 계속될 것"이라고 영국 BBC방송에 말했다.
구기연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HK연구교수는 한국일보에 "이번 시위가 정권 존립을 흔들 사안이라는 걸 정권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며 "히잡이 이슬람 이데올로기의 상징이 됐기 때문에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미니의 죽음은 반정부 민심을 폭발시킨 기폭제였다. 미국의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라 있는 이란은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태다. 2018년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핵합의(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를 일방 파기하고 이란에 대한 고강도 제재를 복원하면서 경제가 파탄 났다. 석유 수출과 금융 거래가 막히면서 당시 8,000달러 수준이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3,000달러 밑으로 떨어졌다. 40%에 육박하는 인플레이션과 높은 실업률로 민심이 흉흉했다.
불만은 핵합의를 주도했던 중도·개혁파를 향했다. 중도 성향의 하산 로하니 대통령(2013~2021년 8월 재임) 후임으로 2021년 강경 보수인 이슬람 신학자 출신 에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이 당선했다. 미국의 선택이 이란의 이슬람 보수화를 부추긴 것이다. 라이시 대통령은 지난해 7월 여성의 복장 단속을 강화하는 '히잡과 순결' 칙령을 반포했고, 그로부터 두 달 후 아미니가 숨졌다.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중동연구센터장은 "트럼프의 핵합의 파기로 정상국가 복귀를 추구했던 온건 개혁 세력이 설 자리가 없어졌다"며 "보수파는 자신들의 기득권에 위협이 되지 않는 수준에서 국민 저항을 진압했다가 풀어주는 식으로 관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반정부 여론이 폭발했지만 이란 체제가 당장 붕괴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구심이 될 정치 세력이나 지도자가 없는 탓이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시위에도 구심점이 없었다"며 "분노가 임계점을 넘기는 데 필요한 통일된 어젠다도 제시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핵합의 파기 이후 명망가들이 대거 해외 망명길에 오른 탓이 크다.
적극적 행동에 나섰던 디아스포라 지도자 그룹 안에서도 내분이 난 상황이다. 최근 팔레비 왕조 마지막 샤의 아들을 지지하며 과거 왕정에 대한 향수를 가진 이들과 개혁·진보 세력 간 갈등이 노출됐다.
정부가 굴복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시위자에 대한 공개 사형 집행 등으로 민심을 틀어막은 이란 정권은 교묘한 상황 관리에 나섰다. 미국 퀸시연구소의 온라인 매체 '리스폰서블 스테이트크래프트'는 "국내 반대파는 강경 진압하는 반면 해외에서는 유화책을 펴고 있다"며 "내년에 열리는 총선과 건강이상설에 시달리는 하메네이 후계자 선정 등을 준비할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에 무인기(드론) 등 무기를 수출해 경제적 숨통이 트인 것도 정부 입장에선 호재다. 중국도 '동아줄'로 등장했다. 올해 3월 중국 중재로 중동 역내 라이벌인 사우디아라비아와 7년 만에 화해했다. 외교적 성과를 내세워 민심을 달래고 사우디와의 교역·투자 재개를 기대한 조치였다.
미국이 한국의 은행에 묶여 있던 이란 석유대금 동결을 풀고 이란과 포로를 맞교환한 것은 제재 해제의 기대를 높였다. 그러나 인남식 교수는 "미국과 이란은 인질과 동결자금을 주고받는 정도 선으로 협상의 동력을 유지하는 게 현재로선 최선"이라며 "내년 미국 대선 이후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나면 새판이 짜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부는 히잡을 착용하지 않은 여성에게 최대 10년의 징역형을 내릴 수 있는 히잡법 제정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한번 자유를 맛본 여성들은 개의치 않고 있다. 지난 2월 한 모임에서 히잡을 벗었다가 최근 태형 74대 처벌을 받게 된 제이나브 카제미는 SNS에 "나는 정의와 억압에 맞서 목소리를 높인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고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썼다.
이란 여성의 20%는 최근 거리에서 히잡을 쓰지 않는다고 BBC가 테헤란의 서방 국가 외교관을 인용해 전했다. 대학생 도냐(20)는 "경찰이 지나갈 때는 겁이 나긴 하지만 이젠 외출할 때 내가 좋아하는 대로 입는다"며 "혹시나 상황이 심각해질 때를 대비해 히잡은 가방 안에 챙겨 다니는 정도"라고 말했다. 테헤란 지하철 벽면이나 광고판에는 수시로 '여성, 생명, 자유'나 아미니의 이름이 적히고, 정부는 이를 지워내기에 급급하다.
구기연 교수는 "시위 전에는 히잡을 쓰지 않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지금은 경찰 앞에서도 히잡을 헐겁게 쓰는 등 극적인 변화가 실제로 일고 있다"고 했다.
아미니의 억울한 죽음이 느리지만 분명한 변화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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