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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아나운서 부인과 영국인 작가 남편의 '서재 결혼시키기' [임현주와 다니엘 튜더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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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시대 철학자 키케로는 "책 없는 방은 영혼 없는 몸과 같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책이 뭐길래, 어떤 사람들은 집의 방 한 칸을 통째로 책에 내어주는 걸까요. 서재가 품은 한 사람의 우주에 빠져 들어가 봅니다.
애서가들에게 '책'은 자아가 자유롭게 유영하며 확장해 가는 우주다. 한정된 공간에 벼르고 별러 가꾼 서재는, 한 사람의 과거부터 지금까지를 아우르는 세계요, 아끼는 마음을 쏟아부은 진귀한 보물창고일 터. 그런데 책을 사랑하는 두 사람이 결혼을 하면서 살림을 합친다면, 서재도 단숨에 결합할까.
앤 패디먼의 베스트셀러 '서재 결혼 시키기'에는 결혼한 지 5년 만에 서재를 합치는 부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각자가 오랫동안 축적해 온 취향과 습관이 너무나 고유했기에, 이들은 서재를 결혼시킬 엄두를 내지 못하고 한동안 별거 상태로 두었다. 여자는 국적과 주제에 따라 연대순으로 세밀하게 구분하여 분류했으나, 남자는 그저 편한 대로 뒤섞이게 꽂는 편이었다. 밑줄도 긋지 않고 책을 소중히 대하는 여자와 달리, 남자는 사우나 안에서 습기를 머금어 축축해진 페이지를 넘기는 인물이다. 이 과정에서 남편은 "결혼해 살면서 이혼을 심각하게 생각한 적은 거의 없는데 그때만은 달랐다"고 할 정도였다. 갈등은 고조되지만 끝끝내 그들은 서재의 결혼에 성공한다. "나의 남편 조지 하우 콜트와 나는 책으로 서로의 환심을 샀으며 서로의 자아만이 아니라 서재와도 결혼을 했다. 내가 양쪽에서 얼마나 좋았는지!"
곧 출산을 앞두고 있는 임현주(38) MBC 아나운서와 영국인 작가 다니엘 튜더(41) 부부도 올 초 결혼을 하면서 서재를 합쳤다. 이달 초,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자리 잡은 신혼집의 서재에서 부부를 만났다.
서재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큰 통창을 통해 북한산 형제봉이 웅장한 자태를 자랑한다. 마치 한 폭의 진경산수화가 창틀이라는 액자 속에 폭 안긴 것 같다. 책을 좋아하는 부부는 창틀 앞에 벤치를 설치해 풍경을 감상하며 독서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책장과 창문을 마주보는 방향으로 주로 튜더가 글 작업을 하는 책상이 놓여 있다. 공간과 조화를 이루는 고풍스러운 가구의 구매처를 묻자, 임 아나운서가 웃으며 말했다. "당근에서 구했어요!"
어림잡아 10㎡(3평) 남짓 서재의 한쪽 벽은 가로 10칸, 세로 7칸의 원목 책장이 정확히 그곳이 제자리임을 아는 듯 딱 맞게 놓여 있다. 책장에 빼곡하게 꽂힌 책만 약 1,000권. 어떤 칸에는 영어 원서만 가득하고, 한쪽에는 요즘 임 아나운서가 빠져 있다는 박완서 작가의 책이 모여 있다. 부부가 책을 출판하는 작가이다 보니, 자신들의 책도 한쪽에 소중하게 비치돼 있다. 분류 체계나 질서가 엄격하지만은 않은 서재의 인상은, 매사 눈길을 끌지만 유난스럽지 않은 부부의 소박한 성정을 꼭 빼닮았다.
책의 물리적 결합은 그렇다 치고, 화학적 결합은 어떠할까. 한 권을 사도 고민을 거듭하며 사는 남편과 꽂힌 책은 일단 사고 보는 부인. 에세이와 여성 작가를 사랑하는 부인과 역사와 고전을 좋아하는 남편. 무거운 벽돌책을 오랫동안 씨름하며 읽는 것을 즐기는 남편과 집안 이곳저곳에 책을 흩뿌려 두고 짬날 때 몇 쪽이라도 읽는 부인.
다른 건 또 있다. 바로 '언어'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정치학, 경제학, 철학을 전공한 튜더는 2010년 영국 시사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한국 특파원으로 부임하면서 한국과 본격적으로 연을 맺었다. 한국어로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할 수 있지만, 모국어인 영어만큼 자유롭지는 않다. 독서는 본질적으로 '언어 행위'다. 이 서재, 과연 평화롭게 또 조화롭게 섞일 수 있을까.
"아, 그 책은 다니엘 거예요."
가장 손이 편리하게 닿는 책장 한가운데 서너 칸을 차지한 건 한국 역사책이었다. '조선왕조실록' '대한황실 황통쟁투사'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 등 한국인도 선뜻 페이지를 넘기지 못할 어려운 책에 시선이 가닿자 임 아나운서는 그것이 남편의 것이라 일렀다. 튜더는 첫 책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을 비롯하여 '조선자본주의공화국' 등 한국과 북한 사회의 이야기를 언어를 넘나들며 쓴다.
"요즘은 소설을 쓰고 있어요.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걸친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이야기를 다루죠. 그래서 최근에는 한국근현대사 책을 많이 읽어요."
튜더의 책상 위에 가장 최근까지 손길을 탄 것으로 추정되는 책 '의친왕과 황실의 독립운동'이 놓여 있었다. 지난 연말부터 올 초까지 경운박물관에서 열린 전시 책자로, 고종의 둘째 아들이자 황실독립운동의 중심이었던 의친왕 이강(1877~1955)의 생애와 활동을 다루고 있다.
"제가 이코노미스트 기자였을 때, (마지막 황손이라 불리는) 의친왕의 10남 이석씨를 알게 됐어요. 그러다 그의 아버지인 의친왕도 알게 됐죠. 의친왕은 1955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사망 2, 3년 전까지도 계속 후사를 봤대요. 독립운동하랴, 자손 보랴 참 파란만장하고 바쁘게 살았어요. 그의 삶은 아관파천, 명성황후 시해, 을사늑약 등 온갖 역사적 사건과 엮여 있는데, 대부분 한국 사람은 그를 알지 못하죠. 이 대단한 인생 스토리를 어떻게 한국인들과 세계에 알릴 수 있을까 싶어 소설을 쓰기 시작했어요."
튜더의 푸른 눈동자가 유독 반짝였다. 김규식, 김란사 등 역사 속 인물의 이름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오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같은 굵직한 사건으로 흘러가며 대화는 한순간 근현대사 격변기로 여행을 떠난 듯했다. 모두, 책이 차곡차곡 쌓은 파편들이 씨줄과 날줄을 엮어 만들어낸 세계였다. 4년 동안 의친왕을 연구했고, 바로 그 전주에 탈고한 따끈따끈한 소설의 줄거리였다. 영어로 쓴 소설은 A4 분량 250쪽에 달한다. 조선 왕실과 대한제국사 등 책장 한복판이 '100년 전 한국'인 이유를 납득할 수 있게 된다.
남편이 '역덕(역사를 좋아하는 괴짜를 이르는 신조어)'이라면, 임 아나운서의 책장은 문학, 여성 작가, 에세이로 요약된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패배의 신호' '슬픔이여 안녕'이나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등 유럽 여성 작가들의 책이 곧잘 눈에 띄었다. 임 아나운서가 2020년부터 잇달아 에세이를 세 권 출간한 작가인 만큼 국내외 유명 에세이도 여러 칸을 차지했다.
"결혼하며 이 집으로 이사오기 전, 제 책을 300권 정도 정리했어요. 과거의 저는 별 다른 기준 없이 마음에 들면 책을 마구 사들였죠. 책을 아주 쌓아두고 살았어요. 지금 이 책꽂이에도 저의 책이 압도적으로 많아요."
결혼 전 30여 년을 완벽한 타인으로 살았던 부부이다. 완전히 다른 문화권에서 자란 만큼 독서를 대하는 태도나 습관도 달랐다. 어린 시절의 독서 경험이 대표적이다.
"저는 10대 청소년 시절 책을 거의 안 읽거나 못 읽었어요. 교과서에 나온 국어 지문을 간접 경험하는 정도였죠. 20대는 취업 때문에 너무 바빴고요. 오히려 30대가 되어서야 책의 매력을 알게 됐어요. 방황하던 시기, 뾰족한 답을 찾을 수 없고 마음의 위로를 얻고 싶었을 때 책을 읽기 시작했죠. 다니엘은 10대 때 책을 엄청 많이 읽었고, 자신의 많은 것이 그 시기에 완성됐대요. 그때에만 키울 수 있는 감수성이 있다는 걸 알기에 그저 부러웠죠." 임 아나운서가 말했다.
"12, 13세 때였을까요. 동네 도서관에서 스티븐 킹 책을 읽었는데 괴물과 귀신 이야기에 아주 빠져들었어요. '독서가 재밌을 수 있구나!' 처음 깨달은 거죠. 그 이후 10대 후반까지 책을 가리지 않고 읽었어요. 전기, 장르 소설, 문학... 손에 집히는 건 뭐든지요." 튜더가 부연했다.
"지난겨울 다니엘과 영국 런던 여행을 했어요. 지하철에서 와이파이가 안 되니까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보지 않고 모두 책을 읽더라고요. 와이파이가 너무 잘 갖춰져 있어도 문제다 싶었죠."
임 아나운서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튜더의 책 리뷰를 계기로 처음 만나 가약을 맺고, 지금도 여전히 책을 매개로 대화하며 사랑을 키워 나가는 부부로서는 오늘날 책을 점점 읽지 않는 세태가 안타깝다.
우리나라 성인의 연간 종합 독서량은 4.5권(문화체육관광부 2021년 국민독서실태)이다. 1년 동안 4, 5권 남짓 읽는다는 거다. 이유로는 '일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다른 매체를 이용하느라' 등이 꼽혔다. 넷플릭스, 유튜브 등에서 다양한 콘텐츠가 범람하는 데다 유독 장시간 일하는 한국 사회의 고달픈 모습을 고려하면 이해되지 못할 것도 아니다. 하나, 책은 단순 문해력뿐 아니라 타자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감능력, 상상력 등 무궁무진한 지적 능력을 강화하는 수단이다.
"청소년 시기 남자 학교에 다녔어요. '남자는 어떠해야 한다'는 육체적이고 마초스러운 분위기가 분명 존재했어요. 슬픈 감정을 느껴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없었죠.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그런 프레임에 나를 가두지 않고 내가 느낀 감정을 그대로 표현해도 된다는 자신감을 얻게 됐어요."
더불어 책은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길러 준다. 매스컴의 주목을 받으며 대중의 여론에 휩쓸리기 쉬운 직업을 가진 임 아나운서에게도 책이 길러준 사고력은, 자아가 흔들리고 위태로웠던 순간 큰 힘이 됐다.
"한국 사회는 너무 빠른 판단과 정답을 원해요. 가운데에 많은 의견이 있어도 '너는 A냐, B냐'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모습에 혼란스러웠던 때가 있어요. 독서를 할 땐 소신을 갖고 내 생각을 발전시킬 수 있었어요. 짧은 콘텐츠나 기사의 댓글만 보면 내 생각을 갖기 어렵죠."
"다른 나라에 비해서 한국은 특히 댓글이 사회를 쥐락펴락하는 듯해요. 댓글이 과대 대표되고 있어요. 제가 생각하는 책의 장점은 바로 댓글이 없다는 점이에요." 튜더가 거들었다.
하루 종일 책에 대한 수다가 끊이지 않는 이 집에는, 내달 새로운 가족이 생길 예정이다. 곧 예비 부모가 될 것을 숨기지 않는 듯 집안 구석구석에는 육아 관련 책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스툴 위의 영어 원서 '너의 부모가 읽었어야 했던 책(The book you wish your parents had read)'이라는 익살스러운 제목의 책이 놓여 있고, 프랑스식 긍정 양육 방식을 다룬 책 '프랑스 아이처럼'은 각각 한국어판, 영문판으로 언어를 달리하여 읽고 감상을 나눈다.
"책은 우리의 집중력과 상상력을 활성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근육을 키우기 위해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듯, 이를 위해 우리의 소중한 시간을 기꺼이 투자해야죠. (다니엘 튜더)"
"독서를 가볍게 필요한 만큼만 슥슥슥 읽어도 되는 행위로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의무적으로 '매일 30분 책 읽을 거야' 하지 않고, 집 여기저기에 책을 두고 5분 정도 슬쩍 읽어도 괜찮아요. 약속 상대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을 위해 외출할 때 가방 속에 책을 한 권 챙기는 건 어떨까요. 일상 속에 녹아든 습관으로 책을 더 가까이 할 수 있어요. (임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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