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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m 파도에다 시신들은 집 안으로... "죽음보다 끔찍했던" 리비아 대홍수

입력
2023.09.15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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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1300명 사망... 실종자도 1만100명
"최종 사망자 2만 명 달할 수도" 예측
데르나 주민 6명 중 1명꼴로 숨진 셈
정치권, 양쪽 정부에 '긴급 조사' 촉구

13일 리비아 데르나 지역에서 구조대가 대홍수 희생자 시신들을 수습해 차량으로 옮기고 있다. 데르나=AP 뉴시스

13일 리비아 데르나 지역에서 구조대가 대홍수 희생자 시신들을 수습해 차량으로 옮기고 있다. 데르나=AP 뉴시스

"모두 잠든 오전 2시 30분쯤, 개가 짖는 소리에 잠이 깨 아래층으로 내려갔더니 발밑으로 물이 차올랐어요. 그리고 어느새 집 안에선 (가족이 아닌) 여성과 아이들의 시신이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리비아 동부 항구도시 데르나를 덮친 대홍수에서 겨우 살아남았다는 후삼 압델가위(31)는 지난 10일 새벽(현지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지옥도가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집 전체를 집어삼킨 물살에 이리저리 떠밀렸다. 동생 이브라힘(28)과 전기 선을 붙잡았다. 덕분에 간신히 5층 옥상으로 피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어쩌면 죽음 그 자체보다도 끔찍한, 상상할 수도 없는 장면들이었습니다." 악몽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14일 영국 BBC방송은 수마(水魔)에서 살아남은 압델가위 등 생존자들이 묘사한 그때 그 순간을 이같이 전했다.

실종자 1만 명... "신화에나 나올 법한 재앙"

열대성 폭풍우와 홍수가 할퀴고 지나간 데르나 일대는 며칠 만에 '죽음의 도시'로 변했다. 데르나 남부의 댐 두 곳이 붕괴하면서 주택 등 삶의 터전은 흔적도 없이 파괴됐다. 건물 파편과 진흙 더미만 남았다. 구조 인력이 사투를 벌였지만 역부족이었다. 사망자는 지금도 시시각각 늘어나고 있다.

현지에 도착한 미국 워싱턴포스트(WP) 취재팀은 리비아가 맞닥트린 이번 재난을 "신화에나 나올 법한 재앙"이라고 표현했다. WP에 따르면 폭풍우·홍수 발생 닷새째인 이날도 데르나 내 스포츠 경기장과 해변 등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시신이 떠다니고 있었다. 거센 물살은 아스팔트 도로를 깎아냈고, 자동차는 맥없이 쓸려 나갔다. 병원들은 시신을 수습한 구급차가 들어설 때마다 부모, 형제, 자녀 등을 찾으려는 실종자 가족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절망은 더 커지고 있다. 이날 이슬람권 적십자사인 리비아 적신월사는 "현재까지 파악된 사망자만 1만1,300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실종자도 최소 1만100명이다. 압둘메남 알가이티 데르나 시장은 전날 아랍권 매체인 알자지라 인터뷰에서 "희생자가 최대 2만 명에 달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데르나 인구는 12만5,000명 안팎이다. 최악의 경우, 주민 6명 중 1명꼴로 목숨을 잃었다는 결론이 내려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오스만 압둘잘릴 리비아 보건장관은 이날 데르나 외곽에서 3,000구 이상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발표했다.

열대성 폭풍우와 홍수가 할퀴고 간 리비아 동부 항구도시 데르나의 붕괴된 건물 앞. 14일 구조대원들의 실종자 수색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데르나=EPA 연합뉴스

열대성 폭풍우와 홍수가 할퀴고 간 리비아 동부 항구도시 데르나의 붕괴된 건물 앞. 14일 구조대원들의 실종자 수색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데르나=EPA 연합뉴스


"건물 6층 높이 파도 휩쓸어"... 정부, 댐 부실 은폐했나

대홍수 사망자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게 된 데에는 댐 붕괴가 결정적이었다.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와 미국 CNN방송 등에 따르면, 데르나의 댐 2곳이 무너지면서 높이 7m에 이르는 거대한 물살이 도시를 강타했다. 레이다 엘 오클리 리비아 전 보건장관은 CNN에 "건물 6층 높이와 맞먹는 거대한 파도가 쓰나미처럼 나라 전체를 휩쓸었다"고 말했다. 얀 프리데즈 ICRC 리비아 대표단장은 "피해 복구에만 몇 달, 어쩌면 몇 년이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데르나 주민들은 정부가 댐을 비롯한 치수 시설을 제대로 보수하지 않은 사실을 문제 삼으며 분노를 쏟아내고 있다. 붕괴된 댐들은 1973~1977년 건설돼 노후화가 상당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는 사실상 보수가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영국 가디언은 2007년 튀르키예의 한 업체와 댐 보수 계약을 맺었지만, 해당 업체가 2011년 리비아 내전 발발 후 현장을 떠났다고 보도했다.

리비아 정치권도 정부의 신속한 조사를 촉구했다. 리비아 정치인들은 법무장관에게 "이번 홍수에 대해 긴급 조사에 착수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번 요청은 동부와 서부를 각각 장악한 양측 정부에서 개별적으로 나왔다고 한다. 리비아는 정국 주도권을 둘러싼 군벌 간 갈등으로 내전이 격화돼 현재 동부의 리비아 국민군(LNA)과 서부 리비아 통합정부(GNU)로 쪼개진 상태다. 홍수 발생 당일 정부가 시민들에게 통행금지를 내리고 집 안에 머물라고 지시한 것을 두고도 "댐 위험성 등을 은폐하려는 의도 아니었느냐"는 비판이 일고 있다.

조아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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