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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사랑해요"... 치매 실종 아내에 띄우는 '전하지 못한 러브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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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치매 실종 경보 문자. 매일 40명의 노인이 길을 헤매고 있다. 치매 실종은 더 이상 남의 문제가 아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무관심하다. 한국일보 엑설런스랩은 치매 실종자 가족 11명의 애타는 사연을 심층 취재하고, 치매 환자들의 GPS 데이터를 기반으로 배회 패턴을 분석했다. 치매 선진국의 모범 사례까지 담아 5회에 걸쳐 보도한다.
재홍(74·가명)은 일찌감치 나와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을 서성이며 기다린 듯했다. 부산 영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가파른 오르막길, 그 언덕 위에서 그는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더운데 왜 나와 계셨어요." "이 정도는 괜찮아요. 그냥 기다리고 있었지요."
집안 곳곳엔 노부부가 함께한 반백년 추억이 액자마다 새겨져 있었다. 두 아들을 결혼시키던 날에도, 교회 권사 취임식에도, 퇴임식 때 손주들 축하를 받던 날에도 사진 속 재홍의 아내 은혜(현재 70세)는 화사한 한복 차림이었다. "참 곱죠. 우리 집사람은 마음씨도 정말 고왔어요." 5남매 장남과 결혼해 시부모 모시고 시동생들 뒷바라지하면서도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을 만큼 착한 아내였다.
"내는 엄마 아부지가 1등, 당신은 2등이다. 엄마 아부지 돌아가시면 그 사랑 당신한테 다 줄게. 그라고서 약속 지키려고 있는 사랑, 없는 사랑 다 보태줄라고 했는데 치매에 걸려 버린 거예요."
아내는 자꾸 집 밖으로 혼자 나갔다가 길을 잃었다. 처음엔 부산 시내만 뱅뱅 돌았다. 교회에 예배하러 가거나 친구들을 만나겠다고 집을 나섰지만, 기억은 어느 순간 뚝 끊겼다. 정처 없이 헤매는 배회(Wandering)의 시작이었다.
과거와 현재의 기억이 뒤죽박죽 될수록 아내의 '외출'은 과감해졌다. 구순이 넘은 친정 노모가 있는 울산, 또는 태어나고 자란 경남 양산을 가야 한다며 노포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아무 버스에나 무작정 올라탔다. "할머니가 돈도 안 내고 앉아 있으니까 이상하다카면서도 버스 기사들도 마음이 급하니까 그냥 태우고 출발해 가뿌리는 거죠." 갈수록 부산을 벗어나 헤매는 날이 많아졌다.
하루가 멀다하고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계속되자, 재홍은 용돈벌이를 위해 나섰던 일(공공근로)을 그만두고, 아내를 돌보는 데 집중했다. 요양원도 알아봤지만, 배회가 심하다며 거부당했다.
"지금까진 길을 잃어버리긴 했어도, 찾는 데 하루를 넘긴 적은 없었는데..." 재홍은 고개를 떨군 뒤, 잠시 숨을 골랐다. "그날, 마지막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2020년 4월 11일. 여느 주말과 다를 바 없던 아침이었다. 오전 내내 아내는 거실 한쪽에서 인지 능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는 콩 고르기 놀이를 했다. 미리 잡혔던 점심 모임을 가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기에, 재홍은 단단히 문단속을 하고 혼자 외출에 나섰다. "내 빨리 갔다 올게요."
40분 만에 후다닥 돌아왔지만, 아내는 집에 없었다. 경비원이 투표(그날은 21대 총선 사전투표 마감일이었다)를 하러 다녀오느라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내는 오후 2시쯤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경찰이 폐쇄회로(CC)TV로 아내의 동선을 추적했다. 아내는 지인들과 영도구 남항동 아파트 모델하우스에 방문한 뒤 헤어졌다. 사은품으로 받은 각티슈 4개를 손에 쥐고 있어 특정하기 쉬웠다. 혼자 동삼동과 영선동 일대를 버스로 이동하던 아내는 15km나 떨어진 사하구의 한 아파트 정류장에서 내렸다. 재홍과 자주 갔던 다대포해수욕장 인근이었다.
그 후 장림동 무지개공단을 향해 걸어가다 홍티예술마을 아트센터 앞에서 서성이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찍혔다. 공장지대와 폐가가 많아 밤이 되면 인적이 매우 드문 곳이었다. 아내가 사라진 날은 아트센터 인근 낙동강 포구에서 낚싯배도 띄우지 않을 만큼 궂은 날씨였다.
재홍은 "경찰이 최선을 다했다"며 연신 고마워했지만, 아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경찰은 이은혜 할머니가 가로등 불빛을 따라 공단 쪽으로 걸어가다 인근 낙동강 포구에서 발을 헛디뎌 미끄러졌을 가능성을 조심스레 거론했다.
"경찰이 각오를 하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도 나는 답답하지요. 산에서 바다에서 강에서 사고를 당했으면 신고가 들어올 거 아닙니까. 그보다 더한 것도 신고가 들어오는 세상인데." 아내가 차고 있던 은팔찌와 은목걸이도 발견되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경찰의 수색은 뜸해졌다.
재홍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내 짝지를 내가 포기하면 누가 챙기겄어요. 안 그래요?"
"우리 집사람입니다. 좀 봐주이소. 이름은 이은혜." 재홍은 자기 몸만 한 피켓을 앞뒤로 짊어지고 그해 마지막 날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부산 전역을 혼자 누볐다.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갔지만, 그래도 지치면 안 됐다. 아내의 마지막 모습이 확인된 홍티예술마을 근처 무지개공단을 밤낮으로 돌며 주차된 차량마다 전단지를 붙였다. 아내가 자주 헤맸던 노포동 터미널부터 부산 최대 규모의 녹산공단, 부산역, 롯데백화점, 부산에서 유명하다는 5일장과 사찰, 공원까지. 사람이 좀 붐빈다 싶은 부산 바닥마다 재홍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오늘 전단지 500장 돌리겠다고 마음먹으면 다 돌릴 때까진 집에 안 들어왔어요. 이건 집사람을 찾고자 하는 내 마음이고, 소망이고, 약속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냥 돌아올 수가 없지요."
두 아들은 이제 그만하라고 아버지를 말렸지만, 재홍은 단호했다.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 하지 않겠나.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제." 그사이 재홍의 기력은 약해졌고, 다리도 불편해졌다. 아내가 사라진 지 벌써 3년째. 이제 재홍은 매달 11일이 되면, 아내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홍티예술마을 인근 포구를 찾는다. 그곳에 가면 거짓말처럼 사라졌던 아내가 나타날 것만 같아서다.
"나는 우리 집사람 죽었다고 생각 안 합니다. '하느님, 제발 어디로 갔는지 그것만이라도 얘기 좀 해주이소' 기도하고 오는 거죠. 만약 살아 본다면 '미안했다 용서해달라'는 말밖에 할 게 없죠."
"은혜야, 내 은행 갔다가 장보고 왔어요. 당신은 지금 뭐하고 있어요?"
재홍이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 보지만 답이 없다. 집 안엔 적막함만 가득하다. 아무도 없다는 걸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재홍은 집에 들어갈 때마다 괜스레 혼잣말을 내뱉어본다.
"너무 그리우니까요. 이렇게 독백이라도 하면서 마음을 붙잡는 거죠." 재홍은 처음에 인터뷰를 할지 말지 주저했다. 한국일보 엑설런스랩이 연락을 취한 모든 치매 실종자 가족들도 같은 반응이었다. 그럼에도 재홍이 용기를 내서 응한 건 "아직도 내가 이토록 당신을 애타게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해가 갈수록 나도 조금씩 아내를 잊어가는 거 같아서 너무 미안했는데, 이렇게라도 얘기하면서 집사람 기억을 떠올리게 해줘서 고마워요."
구순이 넘은 아내의 노모도 3년째 오지 않는 딸을 이따금씩 찾는다. "김 서방, 요새 은혜는 왜 같이 안 오노." "어무이, 은혜 아파서 입원했다 안합니까, 그 병이 빨리 안 낫는 병이라 카대요.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시소. 내가 언능 델꼬 올게요."
살아생전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장담은 못하지만, 재홍은 오늘도 은혜를 불러본다. "내가 죽을 때까지 기억하는 한, 우리 집사람은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살아있다 안합니까."
▶'사라진 엄마를 찾습니다 - 다시 쓰는 실종보고서' 인터랙티브 기사도 읽어보세요. 더 많은 실종 치매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제목이 클릭이 안 되면 아래 주소를 입력하세요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9151127071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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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액설런스랩이 '미씽-사라진 당신을 찾아서' 기획을 시작합니다. 여전히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앞으로 사라질 지 모르는 또 다른 치매 어르신들의 안전한 귀가를 바라며 심층 취재한 '대한민국 치매 실종 보고서'입니다. 9월 18일부터 한국일보 지면과 홈페이지를 통해 5회에 걸쳐 기사와 인터랙티브, 영상 콘텐츠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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