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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 미래, 좌·우도 아닌 일본 ‘리버럴’에 달렸다

입력
2023.09.16 04:40
12면

편집자주

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토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한일관계가 장기적 관점에서도 건설적으로 유지되려면 일본의 현재 보수여당을 지지하는 계층은 물론이고 일본 사회의 미래지향적 발전을 원하는 리버럴 성향의 시민들과의 연대도 강화해야 한다. 일러스트 김일영

한일관계가 장기적 관점에서도 건설적으로 유지되려면 일본의 현재 보수여당을 지지하는 계층은 물론이고 일본 사회의 미래지향적 발전을 원하는 리버럴 성향의 시민들과의 연대도 강화해야 한다. 일러스트 김일영

◇ 좌파도, 우파도 아닌, 일본의 ‘리버럴’

정치적인 입장을 이야기할 때에 흔히 우파 혹은 좌파라는 말을 쓴다. 기존의 사회 체계를 옹호하는 보수적인 사상 혹은 그런 정치적 분파를 우파 혹은 우익이라고 부르고, 기존 체계의 변혁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사상 혹은 그런 정치적 분파는 좌파 혹은 좌익이라고 부른다. 호칭의 역사적인 경위는 무려 1789년 프랑스혁명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혁명 직후에 소집된 국민의회에는 기존 군주제를 옹호하는 보수파(왕당파)와, 공화정을 주장하는 개혁파(자코뱅당)가 함께 참여했는데, 의장 자리에서 볼 때에 오른쪽에는 보수파가 왼쪽에는 개혁파가 자리를 잡았다. 이때부터 보수파는 오른쪽(우파), 개혁파는 왼쪽(좌파)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근대적인 의회 민주주의의 시작을 장식하는 상징적인 사건에서 보수=우익, 진보=좌익이라는 도식이 유래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민주주의의 초창기였던 수백 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다양하다. 수많은 사상과 분파들을 좌파와 우파라는 단순한 도식으로 분류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일본의 복잡다단한 정치적 지형도 좌우의 진영 논리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일본에서는 우파와 좌파라는 구분보다는, ‘보수’와 ‘리버럴(リベラル, 영단어 liberal의 일본어 표기)’이라는 분류가 더 자연스럽게 회자된다. 일반적으로 현 내각을 지지하면 보수파, 현 내각의 교체와 개혁을 지지하면 리버럴이라고 말하지만, 리버럴이 이른바 좌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에서 좌파는 따로 있다. 예컨대, 한국에서는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공산당이 일본에서는 공식적으로 정당 활동을 펼치고 있다. 1922년 창당된 ‘일본공산당’은 일본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정당으로, 현재 이 정당에 소속된 원내 국회의원이 21명(중의원 10명, 참의원 11명)이나 된다. 소수 정당 중에서는 영향력이 적지 않은 것이다. 즉, 일본에서 좌파라고 하면, 일본공산당을 지지하거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사상을 공식적으로 옹호하는 세력을 뜻한다. 그에 비해 리버럴은, 명백하게 지지하는 사상적 기반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용어의 맥락도 모호하다. 리버럴이라는 단어에는 진보주의, 개혁주의라는 뜻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의 자유와 시장 원리를 중시하고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보수적인 뉘앙스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일본 역사 내내 정권을 내놓은 기간이 거의 없는 ‘슈퍼 여당’인 ‘자민당(自民党, ‘자유민주당’을 줄여 자민당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의 영어 호칭도 ‘Liberal Democratic Party’이다. 보수와 수구를 표방하는 정당명에 저항 없이 쓰일 정도이니, 보수와 리버럴이 완벽하게 대립하는 개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 일본의 ‘리버럴’은 온건한 진보주의자, 혹은 개혁적인 애국주의자

9월 셋째 주에 NHK가 발표한 정당지지율을 보면, 여당인 자민당을 지지한다는 답변이 34.1%, 한때 정권 교체의 주체였던 정통 야당 ‘입헌민주당’을 지지한다는 답변은 4.0%, 일본공산당을 지지한다는 답변이 2.3%였다. 언뜻 보면, 개혁 세력이 형편없이 쪼그라든 것처럼 보이는 결과이지만, 꼭 그렇게 볼 것은 아니다. 특별히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무당파)는 답변이 42.8%에 달하기 때문이다. 무당파가 전부 리버럴은 아니겠지만, 우파 성향의 여당에 동조하지 않는 세력이 꽤 두텁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들이 스스로를 리버럴한 경향이라고 정의 내릴 확률은 높다. 달리 말하자면, 일본의 정당 정치가 수많은 리버럴들의 의향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리버럴들이 여당에는 비판적이면서도, 정통 야당이나 좌파 정당을 선뜻 지지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의견이 있지만, 정통 야당이나 좌파 정당이 국가주의와 애국주의를 ‘과하게’ 비판하는 태도가 반감을 불러일으킨다는 분석이 설득력이 있다. 예를 들어, 좌파 성향의 인물들이 공식석상에서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君が代)’ 제창을 거부하는 등의 해프닝이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는다. 군주에 대한 충성심을 노래하는 기미가요의 가사가 과거 제국주의 시절을 찬양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항의 행동이다. 하지만, 전쟁을 겪은 경험이 없는 많은 일본 시민들에게는 그저 ‘반대를 위한 반대’라고 보여진다는 것이다. 즉, 리버럴들은 우익 세력과 같은 배타적인 국가주의는 거부하지만, 일본의 역사적, 문화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애국주의는 포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의 정체성을 통틀어 부인하는 좌파의 태도에는 거부감을 느낀다.

정리하자면, 일본의 리버럴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첫 번째, 기존 체제에는 개혁과 변화가 필요하는 진보적인 성향이 있다. 두 번째, 체제 전복을 주장하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등 급진적인 좌파 사상에는 반감이 있다. 세 번째, 일본의 문화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애국주의에 동조한다. 온건한 진보주의자 혹은 개혁적인 애국주의자 정도로 정의해도 좋을 듯하다. 좌파는 아니지만 진보적이고, 우파는 아니지만 나라의 발전을 원하는 사람들이다. 사실 어느 사회에나 이런 온건한 개혁과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게 존재하지 않을까?

◇ 장기적으로 한일관계 개선의 주체는 ‘리버럴’한 시민들

내가 일본에 살면서 속내를 털어놓을 정도로 친분을 쌓은 친구들도 거의 다 리버럴을 자처하는 지식인들이었다. 대부분은 환경, 인권, 폭력, 차별 등 한일이 공통으로 고민하는 문제에 대해 함께 공감하고, 그런 점에서 일본 사회의 병폐나 모순에 대해서 솔직하고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할 줄 아는 양심적인 이들이었다. 개중에는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서 배타적인 편견을 가감 없이 표하는 경우도 있어서, 타협하기 어려운 벽을 느낀 적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시민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점에서는 서로 공감하고, 함께 분노하는 지점이 더 많았다. 그들과는 한일 간의 예민한 사안에 대해서도 진솔하게 대화할 수 있고, 어려운 문제를 함께 풀어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한일 정부의 거리감이 좁혀지면서, 한일관계가 빠르게 개선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여도,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 한국에서는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와 관련해 일본 정부에 대한 불신이 크고, 간토대지진(관동대지진) 이후 조선인 학살을 부인하는 등 잊을 만하면 나오는 일본 지도층 인사의 과거사 발언도 반감을 부채질할 뿐이다. 일본의 정치적 지형을 이해한다면 당연한 귀결이다. 지금 일본 집권 여당의 맹목적 지지층은 제국주의의 전쟁 영웅을 추켜세우고, 툭하면 ‘혐한’을 들고 나오는 극우 세력이다. 그들에게는 과거사에 대한 반성도, 타 문화에 대한 사려 깊은 이해도 기대하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한일 정부의 수장들이 서로 친근해졌을 뿐, 그것이 한일 간 상호 이해와 문화적 친밀감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장기적인 견지에서 한일관계를 건설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는 일본 사회의 주체는 리버럴을 자처하는 시민들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들은 보수적인 현 여당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일본의 미래지향적인 발전을 원한다. 극우 세력과는 달리, 외국과의 우호적인 교류와 문화적 이해에 대한 관심도 높은 편으로, 오래전부터 한국의 대중문화를 편견 없이 즐기고 사랑해 왔다. 냉랭한 한일관계 속에서도 한국에 대한 관심과 호감을 놓지 않았던 것도 바로 그들이었다. 언젠가는 그들과의 대화를 통한 ‘진짜’ 한일관계의 개선이 가능하기를 꿈꾼다.

김경화 미디어 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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