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어떤 양형 이유> <법정의 얼굴들>의 저자인 박주영 판사가 세상이란 법정의 경위가 되어 숨죽인 채 엎드린 진실과 정의를 향해 외친다. 일동 기립(All rise)!
폐쇄회로(CC)TV 같은 객관적 증거가 있는데도 범행을 부인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자칫하면 형만 높아진다. 그러나 증거가 진술뿐인 범죄(수뢰죄, 마약판매 등)에서, 필로폰이나 뇌물을 주고받은 자들이 입을 다물기만 하면 유죄 입증이 곤란한데도 자백해 의아할 때가 있다. 죄수의 딜레마는 협력하면 둘 다 이득임에도 상호배반이 일어나는 상황을 모형화한 것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액설로드는 죄수딜레마 게임을 반복적으로 실시할 때 효과적인 전략을 알아보고자 컴퓨터 대회를 개최했다. 우승 프로그램은 아나톨 라포포트 교수가 제출한 팃포탯(Tit-for-Tat)이었다. 팃포탯은 처음에는 협력하되 그다음부터는 상대가 하는 대로 응수한다는 단순한 전략을 썼다. 액설로드는 2차 대회를 개최했다. 사전에 1차 대회의 상세한 분석 자료도 제공했다. 팃포탯의 신사적 특성을 역이용한 변칙적 전략들(테스터, 트랜퀼라이저)이 도전장을 던졌으나 2차 대회도 팃포탯이 우승했다.
그 후 액설로드는 계속되는 가상대회를 통해 각 전략의 비중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연구했다. 대회를 거듭하며 신사적 전략(팃포탯 류)과 약자를 착취하는 약탈적 전략(해링턴)이 백중하게 맞섰다. 그러나 200여 세대에 이르자 해링턴의 먹잇감이 줄었고, 1,000번째 세대에 이르러 해링턴은 멸종했다. 팃포탯은 가상대회에서도 1등을 차지했다. 액설로드는 이 실험들을 통해 이기적 존재 사이에서 강제 없이도 상호 협력이 창발하고 진화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리처드 도킨스는 액설로드의 저서 '협력의 진화'의 추천사에서 '지구 위 모든 사람이 이 책을 공부하고 이해한다면 이 행성이 더 살기 좋은 곳이 되리라고 굳게 믿는다. 세계의 지도자들을 모두 가두어놓고 이 책을 준 다음 다 읽을 때까지 풀어주지 말아야 한다'고 극찬했다.
팃포탯도 고전한 상대가 있다. 배반에는 즉각 응징하나 상대의 협력에는 열 번에 한 번쯤 협력하는 얌체 프로그램 요스가 대표적이다. 팃포탯과 요스가 대전한 예를 보면, 처음에는 서로 협력하지만 갑자기 요스가 배반하고, 팃포탯도 배반에 배반으로 대응한다. 단 한 번의 배반이 상호배반의 메아리를 낳아 둘 다 막심한 손해를 봤다.
서로 협력하면 모두에 득인데도 도대체 왜 파국으로 치닫기만 하는 걸까. 관용이 부족해서일까. 팃포탯 전략을 다시 보자. '먼저 배반하지 않는다(신사적 태도). 상대가 배반하면 응징한다. 그 후에는 모두 잊는다. 상대가 또 배반하면 관계가 아무리 좋았더라도 절대 눈감아 주지 않는다' 팃포탯은 협력만 강조하는 전략이 아니다. 2차 대회 최상위 15개 중 14개가 신사적 프로그램이었는데, 이들 사이에서는 상대의 도발에 얼마나 즉각적이고 일관되게 보복하는가, 하는 점에서 우열이 갈렸다.
'맘씨 좋은 녀석이 일등한다(Nice guys finish first, 액설로드의 이론을 도킨스가 소개한 BBC 방송)'는 원리가 지켜지려면, 먼저 요스 같은 악당을 철저히 응징해야 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래의 그림자가 현재에 충분히 길게 드리운다는 사실을 모두 용인하는 것'이다. 팃포탯을 통한 협력의 진화는 죄수게임이 무수히 반복됨을 전제한다. 미래세대는 죽든 말든, 내 한 몸 편히 살다 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뜨내기 지구 방문자가 다수인 한, 팃포탯이 아니라 팃포투탯포탯팃이 와도 절대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없다. 혹시 현실에서는 해링턴이 모두 잡아먹고 게임이 끝나는 건 아닐까. 현세는 해링턴이 지배하는 1,000번째 세대 아닐까.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