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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공유해야 할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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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P, 외부인 출입금지.'
고급아파트에 배달을 갈 때 마주치는 경고 문구다. 라이더들은 이런 아파트를 '천룡인아파트'라고 부른다. 만화 원피스의 세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귀족계급을 '천룡인'이라 칭하는 것에 빗댄 말이다. 2018년 라이더들이 노동조합 라이더유니온을 만들면서 중점적으로 제기한 것도 이 문제였다. 라이더들은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자신들을 화물용 엘리베이터에 태우는 아파트 한복판에 '손님은 귀족이 아니고, 라이더는 화물이 아닙니다'라는 플래카드를 펼쳤다. 경비 노동자들이 라이더들을 둘러싸고 '아파트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말라' 소리쳤지만 라이더들은 물러나지 않았고 화물용 엘리베이터에 라이더를 태우는 일은 중단됐다. 5년이 지났지만 '출입금지' 경고문은 늘어만 간다. 최근엔 아파트 단지 입구까지 철책 펜스를 치기 시작했다. 라이더들이 음식을 전달하려면 아파트 단지 입구, 1층 출입구, 손님의 문 앞에서 총 세 번의 벨을 눌러야 하는데 흡사 보안시설에 들어가는 것 같다. 라이더의 출입만 금지되는 건 아니다. 공원 역할을 하던 아파트 단지 출입이 막히면서 동네 아이들이 함께 놀던 놀이터는 입주민 자녀만의 공간으로 변했다.
도심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고급 아파트는 대부분 원주민들이 살고 있던 집과 동네를 부순 땅 위에 건설된다. 대중교통과 학교 등 공적자원들도 아파트를 중심으로 재배치되어 동네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만, 자산이 없는 사람은 출입할 수 없는 성이 되어버렸다. 아파트만이 아니다. 모든 주민이 이용했던 학교 운동장 입구엔 자물쇠가 채워졌고, 도서관은 줄어들었다. 공적공간이 지워지고 커피숍, 헬스장 등 돈을 내야 쓸 수 있는 사적공간이 도시를 채웠다. 장애인, 어린이, 노인, 육체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배제는 노키즈존 노시니어존은 물론, 교육과 여가활동 등 생활공간에서의 분리와 차별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풍경은, 정치경제적 갈등과 투쟁의 산물이다.
남루한 외부인을 배제하고, 비슷한 경제적 문화적 배경을 지닌 이들끼리 같은 시공간을 향유하는 건 구성원에게 편안함과 안정감을 준다. 그러나 외부와 단절된 유토피아는 공적 시민으로서의 감각을 지워버리고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든다. 전 언론노조 위원장이 김만배 같은 로비스트에게 책값으로 1억6,000만 원이나 받은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자기 책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대통령이 극우 유투버 수준의 이념전쟁을 벌이고 있지만 이를 비판하는 여권인사가 보이지 않는다.
작금의 정치지형은, 전세금 8,000만 원을 떼여 목숨을 끊는 이들, 자신의 가치가 시간당 9,620원에 불과한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괴로워하는 이들의 삶과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일터에서 사용할 에어컨 한 대, 편히 누울 수 있는 휴게실 한 칸, 자유롭게 탈 수 있는 버스 한 대를 소망하는 사람들이 자꾸만 지하철과 도심 한복판으로 나오는 이유다. 추방된 이들이 살기 위해서는 소수가 점령한 사적공간을 우리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공적공간으로 만드는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만의 유토피아,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무너뜨려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넓은 땅을 발견할 수 있다. 비록 그곳이 디스토피아처럼 힘들고 끔찍할지라도 경계와 차이를 넘어 우리는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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