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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전쟁, 처칠을 소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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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던 1941년 6월 22일 영국의 전시 내각을 이끌던 윈스턴 처칠 총리의 방송 연설은 이랬다. “우리는 히틀러와 나치 체제의 모든 것을 그 흔적까지 없애기로 결심했습니다. 나치 제국에 대항하여 싸우는 그 어느 개인도 국가도 우리는 지원할 것입니다. 히틀러와 함께하는 그 어느 개인도 국가도 우리의 적이 될 것입니다. (중략) 우리는 당연하게도 러시아와 러시아 국민을 도울 것입니다.”
1919년 러시아 혁명 당시 영국 육군장관이었던 처칠은 러시아 적군에 대항하는 백군을 지원하는 등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하지만 독일 나치의 공세 앞에서 “러시아의 위험은 우리의 위험”이라며 공산주의자들과 힘을 합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소련이 무너지면 영국도 무너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가의 존망이었다. 더구나 그에게 나치는 공산주의보다 더 위험한 전쟁 기계였다. “모든 형태의 인간의 사악함을 모아 놓은 것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그 사악한 나치 체제의 동맹이 이탈리아와 일본이었다. 일본이 그해 12월 진주만을 공습해 미국이 참전하면서 추축국 대 영국ㆍ미국ㆍ소련의 연합국 간 세계대전으로 확대됐다.
윤석열 대통령과 여권이 ‘자유민주주의 대 공산전체주의’라는 구도로 역사ㆍ이념전의 드라이브를 걸고 있지만 냉전 이전 20세기 초의 정치ㆍ사상 구도는 전혀 달랐다. 자유민주주의나 공산전체주의라는 용어나 개념이 없거나 희미한 때였다. 민주주의는 고사하고 군주제를 벗어나지 못한 나라도 많았고 서구 열강의 식민지 지배 경쟁이 한창이던 상황에서 제국주의, 인종주의, 민족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여러 이념과 사상이 경합했다. 이 중에서 자유세계, 아니 인류에게 가장 위험한 것으로 드러난 게 인종주의와 제국주의, 전체주의가 결합된 나치즘과 파시즘이었다. 일본의 군국주의도 그 대열 편이었다.
처칠마저 스탈린과 손을 잡던 마당인데, 하물며 나라를 잃은 약소 민족들은 어땠을까. ‘가짜 혁명’이라는 게 사후에 드러났지만 소비에트는 그때만 해도 제3세계의 독립과 해방을 표방했기에 제국주의에 시달리던 민족들에겐 우군으로 여겨졌다. 나치즘이나 파시즘에 격렬하게 맞섰던 측도 주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적대 관계였던 나치즘과 공산주의가 전체주의의 쌍생아라는 인식이 대두된 것은 1940년대 후반이었다. 스탈린이 동유럽에 위성국가를 건설하며 소련식 제국의 본색을 드러낸 데 이어 그의 사후 소련의 실상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뒤였다. 마르크스주의가 전체주의 이론임을 파헤친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 출간된 해가 1945년이고, 스탈린 정권이 나치 체제처럼 인종주의와 제국주의 등에 기반한 전체주의 정권임을 갈파한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이 나온 것도 1951년이다. 2차 대전 후 냉전 시대에 접어들면서 급격한 정치사상의 패러다임 전환이 이뤄진 셈이다.
홍범도가 타계한 1943년은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다. 당시 처칠의 기준에서 보면 홍범도는 인류 파멸을 구원하는 진영에 속했고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 군인이었던 백선엽은 인류 최악의 체제에 복무한 이였다.
굳이 처칠의 기준을 소환한 것은 당대의 맥락을 살피지 않고 독립전쟁의 영웅들에 대해 지금 잣대로 ‘빨갱이’ 딱지를 붙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조지 워싱턴과 토머스 제퍼슨이 노예 소유주였다는 이유로 동상을 철거하려는 미국 일부 좌파들의 철부지 짓을 한국 우파들이 정권 차원에서 벌이고 있으니 황당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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