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기사
"내가 기억하는 한, 살아 있다 안 합니까"... 오늘도 사라진 아내의 이름을 불러본다
이미 가입된 회원입니다.
만 14세 이상만 회원으로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치매 실종 경보 문자. 매일 40명의 노인이 길을 헤매고 있다. 치매 실종은 더 이상 남의 문제가 아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무관심하다. 한국일보 엑설런스랩은 치매 실종자 가족 11명의 애타는 사연을 심층 취재하고, 치매 환자들의 GPS 데이터를 기반으로 배회 패턴을 분석했다. 치매 선진국의 모범 사례까지 담아 5회에 걸쳐 보도한다.
'배회 중인 OOO씨를 찾습니다.'
오늘도 당신 휴대폰에선 치매 노인을 찾는 실종 경보 문자가 울렸을지 모른다. 경찰에서 보내는 하루 평균 발송 횟수만 3.97번. 누군가에겐 일상의 집중을 깨트리는 불편하고 귀찮은 알람일지 모르나 소중한 부모와 배우자를 잃어버린 가족들에겐 온몸이 으스러질 만큼 간절한 외침이자 뼛속에 사무치는 그리움의 신호다.
대한민국에서 지난해 실종된 치매 노인 신고 건수는 1만4,527건. (더불어민주당 임호선 의원실)10년 전보다 딱 2배 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39.8명(일평균)의 치매 노인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다행히 많은 이들이 안전하게 가족 품으로 돌아오고 있지만, 박승원씨처럼 기다림이 길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내년이면 치매 환자가 10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면서 '치매 실종'은 더 이상 남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일보 엑설런스랩은 두 달 동안 전국을 돌며, 경찰청 '안전드림' 사이트에 올라온 정보를 토대로 실종된 치매 노인 54명(7월 22일 기준)의 가족을 접촉해 인터뷰를 시도했고, 긴 설득 끝에 11명의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치매 어르신들은 왜 실종됐고, 마지막 행적은 어디였을까. 왜 우리 사회는 골든타임 안에 그들을 찾지 못했을까. 11명의 어르신이 사라진 지 2만7,013일째. 이 기사는 여전히 돌아오지 못한, 앞으로 어디선가 사라질 또 다른 치매 어르신들의 안전한 귀가를 바라는 마음에서 써 내려간 '다시 쓰는 실종 보고서'이다.
⑤이성범 - 독배가 된 CCTV
지난해 11월 3일은 아버지의 77번째 생신이었다.
이성범(현재 78세)은 본인 생일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아들 이름만큼은 뇌리에 박힌 듯 또박또박 말했다. "아버지 내가 누구야?" "내 아들, 이.정. 훈."
함께 사는 가족이라곤 성범과 정훈(52), 둘밖에 없었다. 서로 표현은 안 했지만 부자의 정은 두터웠다. 그날 해산물을 좋아하는 성범을 위해 들른 횟집에서 정훈은 먹기 좋게 새우와 조개 껍데기을 벗기느라 밥을 거의 먹지 못했다. 점심 식사를 먼저 마친 성범은 담배를 피우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후다닥, 밥을 욱여넣고 따라나섰는데 아버지가 없었다. 순식간이었다. "사장님, 우리 아버지 못 봤어요?" "방금까지 계셨는데." 주변을 한 바퀴 내달렸지만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근처 파출소에 신고부터 했다.
경찰은 심드렁했다. 벌건 대낮, 횟집이 모여 있는 식당 거리니까 걱정 말라는 투였다. 경찰은 성범이 횟집을 나와 다리를 건너 동쪽의 삼천 뚝방길로 내려갔을 거라 했다. 동쪽(전북 전주 평화동)으로 가는 길에 자리 잡은 주유소 폐쇄회로(CC)TV가 단서였다. 경찰 말만 믿고 이틀을 뚝방 주변을 뒤지고 다녔지만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동쪽으로 계속 가면 아파트 단지가 밀집한 곳이 나오지만, 한 건의 신고도 없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경찰에게 물었다. "주변 CCTV 다 확인한 거 맞아요? 남쪽으로 직진할 수도 있잖아요!"
아들의 예측은 맞았다. 성범이 마지막으로 확인된 곳은 횟집에서 남쪽으로 1시간 거리에 있는 모악산 입구였다. 정훈은 다리가 풀렸다. 그날은 그해 처음으로 수은주가 영하로 떨어질 만큼 한파가 몰아친 날이었다. 가을 점퍼만 걸친 아버지는 맨발이었다.
"자기 부모라면 그렇게 대충대충했을까요?" 정훈은 엉뚱한 곳을 찾아 헤맨 그 며칠이 "평생 한이 맺히는 순간"이라며 울분을 터뜨렸다.
치매 실종 노인은 인지 기능과 상황 판단 능력이 떨어져 목적지 파악이 쉽지 않다. 그렇기에 경찰은 신고가 들어오면 폐쇄회로(CC)TV에 의지해 수색 방향을 잡아 나간다. 문제는 실종 사건에 투입되는 경찰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동시간 추적이 쉽지 않고, 제한된 지역만 살피다 보면 오판할 수 있다는 거다. 그사이 골든타임은 흘러간다.
정훈은 그날 이후 가만히 있다가도 갑자기 숨이 잘 안 쉬어진다고 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였다. 그나마 그가 맘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은 모악산이다. "아버지랑 같이 있는 것 같아 숨이 쉬어져요." 이제 정훈이 바라는 것은 딱 하나다. "아버지가 내 이름을 한번만 다시 불러주는 것, 그거면 돼요."
⑥최귀순 ⑦주태우 - 냉담한 그 한마디
"우리 모친이요? 전국 팔도의 절이란 절은 혼자 다 찾아다닐 만큼 강했던 사람입니다. 여직 못 돌아오는 건 다른 이유가 있지 않겄어요?"
반듯하게 코팅된 전단지를 꺼내든 막내아들 김희봉(52)의 목소리가 커졌다. 11년 전 8월 희봉의 어머니 최귀순(현재 88세)은 요양병원에서 사라졌다. 6남매 모두 생업을 포기하고 3개월이 넘도록 전국을 헤맸고, 사람 찾는 방송에도 출연해봤지만 엄마를 봤다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그때부터 방향을 틀었다. 사라진 게 아니라, 누군가 데려갔을 수도 있지 않을까. '치매 노인을 데려다가 주민등록증을 새로 발급받아 요양원이나 정신병원에 등록해 국가보조금을 타낸다'는 흉흉한 얘기가 나돌 때였다.
17년 전 아버지 주태우(현재 101세)를 잃어버린 아들 정화(58)도 '같은 의심'을 품고, 전국 요양보호시설에 전단지 수천 장을 보냈다. 하지만 유일하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차라리 안 받는 게 나을 뻔했다. "이런 쓸데없는 거는 더 이상 보내지 마세요!"
⑧임진락 ⑨배태형 - 외면이 의심을 키운다
더 험한 일을 겪은 이도 있다. 2007년 강화도에서 실종된 어머니 임진락(현재 97세)을 찾으러 나선 아들 성만용(58)은 인천과 김포 일대 노인보호시설 문을 홀로 두드렸다가 들려 나온 채 쫓겨나고 신고까지 당했다.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손이 떨릴 만큼 억장이 무너져요."
2015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해 1월 전남 순천에서 실종된 배태형(현재 91세)의 손자 석현 역시 요양시설에서 하도 꺼려해서 접근할 엄두조차 못냈다고 아쉬워했다.
이처럼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또 한번 좌절하게 만드는 건 주변의 냉소다.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달려갈 이들에게 차가운 말 한마디는 비수로 꽂힌다.
"10년 넘게 생사 확인이 안 되는데 자식 입장에선 누군가 가뒀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근데 경찰은 그러대요.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냐고요. 상상력이 풍부하다고요." 벌써 12년째 아버지 김환오(현재 87세)를 기다리는 아들 홍기(55)의 가슴도 그렇게 너덜너덜해졌다.
⑩김환오 - 꽃은 아버지다, 그리움이다
낡은 주판과 수첩, 녹슨 모종삽과 원예 가위,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의 앳된 고교시절 흑백사진까지. 아들 홍기가 가장 아끼는 공간인 작업실은 아버지 인생이 깃든, 손때 묻은 물건들로 가득했다. 아버지는 2011년 12월 아들 작업실이 있는 건물을 관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다 길을 잃고 실종됐다. 12년이 지났고 아버지는 이제 보이지 않지만, 이곳에 오면 아버지가 바로 옆에 있는 것 같다.
아버지는 법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다. 선거철만 되면 아버지 앞으로 투표 안내 우편물도 날아온다. 홍기는 아직 아버지의 '실종 선고'를 하지 않았다. 실종 상태가 5년이 지나면 신청할 수 있지만, 미안함 때문에 미뤘다. "만약 아버지가 나를 잃어버렸다면 포기했을까요. 아닐 것 같거든요."
홍기는 조각가이자 화가다. 모범생이던 형이나 누나와 달리 말썽만 피우던 막내가 미술에 마음을 붙이자 아버지는 많이 뿌듯해했다. 그의 작업실 한편에는 커다란 꽃 그림이 있었다. 아침마다 마당에서 꽃과 화초, 나무를 돌보던 아버지의 모습을 계속 떠올리며 그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 꽃은 인생이었다. "바위 틈에 이렇게 올라오는 꽃이 있어요. 그걸 보면서 '봐라, 돌틈에도 살라꼬 이래 나온다' 그러면서 저보고도 저리 열심히 살아야 한다 이러셨죠." 이제 아들에게 꽃은 아버지이자 그리움 그 자체다. 아버지를 찾지 못하는 답답함은 검은색 프레임으로 녹이고, 아버지가 좋아했던 꽃(용설란) 색깔이 생각날 때마다 덧칠했다. 그림은 아직 미완성이다.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홍기는 인터뷰 내내 그림 앞을 떠나지 못했다.
⑪이은혜 - 기억하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은혜야, 내 은행 갔다가 장보고 왔어요... 당신은 지금 뭐하고 있어요?"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보지만 답이 없다. 집 안엔 적막함만 가득하다. 아무도 없다는 걸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남편인 재홍은 집에 들어갈 때마다 괜스레 혼잣말을 내뱉어 본다.
"너무 그리우니까요. 이렇게 독백이라도 하면서 내 마음을 붙잡는 거죠."
재홍은 처음에 인터뷰를 주저하고 망설였다. 한국일보 엑설런스랩이 연락을 취한 모든 치매 실종자 가족들도 같은 반응이었다. 그럼에도 재홍이 응한 건 "아직도 내가 이토록 당신을 애타게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서"라고 했다.
정말로 그랬다. "해가 갈수록 나도 조금씩 아내를 잊어 가는 거 같아서 너무 미안했는데, 이렇게라도 얘기하면서 집사람 기억을 떠올리게 해줘서 고마워요."
구순이 넘은 은혜의 노모도 3년째 오지 않는 딸을 이따금씩 찾는다. "김 서방, 요새 은혜는 왜 같이 안 오노." "어무이, 은혜 아파서 입원했다 안합니까, 그 병이 빨리 안 낫는 병이라 카대요.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시소. 내가 언능 델꼬 올게요."
살아생전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장담은 못하지만, 재홍은 오늘도 은혜를 불러본다. "내가 죽을 때까지 기억하는 한, 우리 집사람은 절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살아 있다 안합니까."
▶위 기사는 <"남편 사라진 그날, 내 세상도 멈췄다"... 어제도 치매로 40명 실종 신고>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해당 기사를 확인하시면 한층 이해를 높일 수 있습니다. 제목이 클릭이 안 되면 아래 주소를 입력하세요.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90909040005600?did=NS&dtype=2
▶'사라진 엄마를 찾습니다 - 다시 쓰는 실종보고서' 인터랙티브 기사도 읽어보세요. 더 많은 실종 치매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제목이 클릭이 안 되면 아래 주소를 입력하세요.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91511270711435
2만7,013일의 기다림
배회 미스터리를 풀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외출
매일 길을 잃어도 괜찮아
단 3초, 당신의 관심이 있다면
#기억해챌린지에 동참해주세요
신고 사유를 선택해주세요.
작성하신 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로그인 한 후 이용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구독을 취소하시겠습니까?
해당 컨텐츠를 구독/취소 하실수 없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