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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장애 여성노숙인은 어쩌다 '묻지마 폭행'범이 됐나

입력
2023.09.05 00:10
수정
2023.09.05 09:02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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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장애 노숙인, 일면식 없는 여성 때려
코로나 감염된 탓 시설 나오자 투약 중단
노숙인 격리, 정신질환 돌봄망 보완해야

서울 양천구 정신질환 여성 노숙인 재활시설 '수선화의 집'. 박시몬 기자

서울 양천구 정신질환 여성 노숙인 재활시설 '수선화의 집'. 박시몬 기자

지난달 27일 서울지하철 9호선 등촌역 에스컬레이터에서 한 노숙인이 60대 여성을 밀어 넘어뜨리고 마구 폭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40대 여성 박모씨. 그는 경찰 조사에서 “갈 곳이 없어 교도소라도 가고 싶어 그랬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와 일면식도 없는 ‘묻지마 폭행’에 여론은 다시 분노했다. “잇단 흉악범죄에 편승했다” “교도소가 얼마나 편하면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때리느냐” 등 온라인 커뮤니티는 비난 글로 도배됐다.

명백한 범죄였다. 하지만 박씨는 노숙인이었다. 또 지적장애인(3급)이었다. 사연을 들여다봤다. 범행 이면엔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만 돌릴 수 없는 사각지대가 곳곳에 숨어 있었다.

지난달 30일 서울 양천구에 있는 노숙인 재활시설 ‘수선화의 집’을 찾았다. 박씨가 4년 가까이 머문 곳이다. 김기혜(79) 원장이 1998년부터 운영하는 개인 시설로 정신질환 여성 노숙인들의 재활을 돕고 있다. 김 원장에 따르면 박씨는 지적장애를 갖고 태어나 스무 살 이후 복지시설을 전전하며 살았다. 김 원장은 “사고 한 번 친 적 없는 착한 분”이라며 박씨를 안타까워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한없이 온순했던 그를 묻지마 범죄자로 만들었다. 해당 시설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여성 노숙인 10명이 거주했는데, 지난달 21일 박씨를 포함한 4명이 코로나19에 감염됐다. 공간이 비좁은 탓에 1인 격리가 어려워지자 김 원장은 이따금 강원 춘천시 본가에 내려가는 박씨에게 집에서 잠시 쉬다 오라고 권했다.

시설을 벗어나자 문제가 생겼다. 박씨는 복용하는 약이 다 떨어져 평소 다니던 정신과에 전화했지만, 병원 측은 “코로나19에 걸렸다”며 내원을 금지했다. 김 원장의 문의에도 “박씨 본가 인근 병원에서 똑같은 약을 처방받을 수 있게 연락해 두겠다”는 말뿐이었다. 그러나 박씨는 감염병 확진으로 정신과를 방문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투약도 중단됐다.

그에게 의학적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 이모(72)씨는 통화에서 “딸이 코로나19 약과 정신과 약을 함께 먹어선 안 된다고 해 그런 줄로만 알았다”고 말했다. 지갑을 분실하는 등 개인사까지 겹치자, 투약 중단으로 억제하지 못한 스트레스가 시설에 복귀하던 중 폭발한 것으로 추정된다.

박씨의 비극은 여전히 취약한 사회안전망의 여러 지점을 드러냈다. 노숙인 시설은 집단 감염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영세했고, 관리에서 벗어난 정신질환자는 돌봄에서 방치됐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보호 시스템이 좀 더 촘촘해져야 하는 이유다. 임덕영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은 4일 “노숙인 격리 공간 마련에 관한 규정이 불안정한 상태”라며 “주거를 먼저 제공한 다음 치료를 받게 하는 ‘하우징 퍼스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오세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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