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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페이스만은 안 돼'… 높아진 K뮤지컬 위상, 창작의 일부 된 'PC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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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ㆍ소ㆍ문’은 ‘수상하고 소소한 문화 뒷얘기’의 줄임말로 우리가 외면하거나 놓치고 지나칠 수 있는 문화계 이야기들을 다룹니다.
'블랙페이스(blackface·검은 피부 분장) 피한 영리한 연출' vs. '작품의 본질인 인종 갈등 문제는 제대로 표현하기 어려운 태생적 한계'.
국내 초연임에도 지난 7월 개막 후 주요 티켓 예매 사이트 판매 순위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는 논레플리카(원작의 대본, 음악을 제외한 나머지는 새롭게 창작) 라이선스 뮤지컬 '멤피스'. 완성도 높은 만듦새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지만 주제를 전하는 연출 방식과 관련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나옵니다.
'멤피스'는 1950년대 흑백분리 정책이 유지되던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를 배경으로 흑인 여가수와 백인 남성 DJ의 꿈과 사랑을 다룹니다. 당연히 2009년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초연에는 흑인과 백인 배우가 고르게 출연했죠. 그래서 한국 배우들이 출연하는 라이선스 공연 일정이 전해졌을 때 인종 표현 방식에 대한 궁금증이 컸는데, 한국 제작진의 선택은 피부가 아닌 머리색의 차이였습니다. 흑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부추긴다는 비판과 함께 사라져 가는 '블랙페이스'를 피하면서 인종 차이를 드러내기 위한 무수한 고민 끝에 나온 연출 방식이었죠.
김태형 연출가에 따르면 흑인에 대한 혐오적 표현 방식을 택하지 않기 위해 흑인을 배우들 모습 그대로 표현하고 백인을 좀 더 백인처럼 보이게 만드는 방식으로 접근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이 과정에서 백인을 맡은 일부 배우들은 과장된 금발 가발을 착용해 오히려 우스꽝스럽게 그려지기도 합니다. 또 "음악과 이야기, 배우들의 연기까지 모두 훌륭하지만 여전히 인종 갈등을 다루는 이 작품의 본질을 최대치로 보여주기에는 한계가 있다(공연 칼럼니스트 박병성)"는 평가도 나옵니다. 문화예술계를 강타한 'PC주의(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요구가 비교적 덜 대중적인 공연 분야에서도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인 셈입니다.
사실 공연계가 PC주의를 예민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되지 않았습니다. 지난 7월 막을 내린 뮤지컬 '할란 카운티'는 2019년 초연만 해도 흑인 노예 라일리 역 배우가 얼굴을 검게 칠하고 나왔으니까요. 이보다 앞서 흑백 인종차별 문제를 다룬 뮤지컬로 2007년, 2009년, 2012년 공연된 '헤어스프레이'는 말할 것도 없죠.
그럼 최근 공연계가 이렇게 블랙페이스를 민감하게 받아들이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한국 드라마와 영화가 잇따라 타국의 문화 감수성 몰이해 논란에 휩싸인 사례가 있습니다. 위상이 달라진 한국의 공연 콘텐츠도 이제 로컬이 아닌 글로벌 문화 감수성을 적용해야 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더욱이 한국 뮤지컬의 해외 진출이 활발해진 만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한국 뮤지컬 소식을 찾아보는 해외 관객도 늘었습니다.
지난해 뮤지컬 '아이다'에 출연한 네덜란드 교포 배우 전나영은 머리를 여러 갈래로 땋아 넘긴 드레드 헤어(레게 머리) 스타일의 '아이다' 홍보용 사진을 SNS에 올렸다가 해외 팬들의 항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문화 도용(Cultural Appropriation·특정 문화 요소를 이해 없이 차용), 인종차별이라는 이들의 공격에 전나영은 "아이다는 엘튼 존이 작곡한 디즈니 뮤지컬의 레플리카(원작을 변형 없이 그대로 무대에 올리는 것) 버전의 라이선스 뮤지컬"이라는 해명을 SNS에 띄우기도 했죠.
해외 공연계는 일찌감치 표현의 자유와 PC주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며 미묘한 줄타기를 해 왔는데요. 블랙페이스를 지우고 소수인종이 주인공을 맡는 식의 변화가 일고 있죠. 2016년 영국 런던에서는 연극 '해리 포터와 저주받은 아이' 초연에서 흑인 배우가 헤르미온느를 연기해 논란이 된 일이 있었습니다. 엠마 왓슨이 연기한 영화 버전의 백인 헤르미온느에 익숙한 팬들의 거부 반응은 소설 원작자 조앤 롤링이 SNS에 '헤르미온느에 대해 백인이라고 특정한 적 없다'고 밝히고 나서야 진정이 됐죠.
PC주의는 이렇게 제약이 되는 동시에 신선한 창작 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미국 건국 주역들을 백인이 아닌 유색인종 배우들이 맡은 2015년 브로드웨이 초연 뮤지컬 '해밀턴'은 아직까지도 최고 인기 뮤지컬로 꼽히고 있죠.
서울시오페라단이 8, 9일 광화문광장에서 선보이는 야외 오페라 '카르멘'은 3시간 분량의 원작을 70분으로 압축하는 과정에서 PC주의가 반영됐습니다. 프랑스 소설가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소설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오페라 '카르멘'에서 돈 호세의 맹목적 사랑은 현대적 시선으로는 데이트 폭력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이번 야외 오페라 '카르멘'은 "미카엘라가 돈 호세를 찾아갔다가 군인들에게 희롱당하는 장면 등을 빼고 자극적 치정 소재보다 탱고와 설치미술 등 다양한 볼거리에 집중할 예정(박혜진 서울시오페라단 단장)"이라고 합니다.
공연계의 PC주의 적용에 아직까지 모범 답안은 없습니다. 다만 SNS 등을 통해 각국 문화예술이 전 세계로 빠르게 전파되는 만큼 타국의 문화적 감수성을 존중하는 등 PC주의를 과거보다 예민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시대가 됐고, PC주의가 크리에이티브의 한 요소가 된 것만은 분명한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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