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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왜 일본보다 유머 없는 사회가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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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토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 엄숙주의 일본 사회에도 나름의 유머 코드가 있다.
일본이 유머가 넘치는 사회는 아니다. 특히 외부인의 눈에서 보자면, 예의와 명분을 중시하는 엄숙주의 문화 속에 웃음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어 보인다. 그런 측면도 분명히 있다. 웬만해서는 긴장하지 않는 체질인 나도 일본에서는 회의나 면접 등의 분위기가 하도 진지해서 뒷목이 뻣뻣해진 경험이 몇 번이나 있었다. 화합과 질서를 중시하는 집단주의적인 문화 때문에, 판을 뒤집는 농담을 대뜸 던지는 것도 조심스럽다. 일본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일본인은 왜 이렇게 유머 감각이 없을까” 한탄하기도 했다. 유머 감각은 그 사회에 축적된 경험과 기대감에 바탕을 둔 문화의 일부다. 일본 문화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깊어진 뒤에야, 일본 사회 나름의 유머 코드가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식 유머 감각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만자이(漫才)’라는 예능 형식이 있다. 코미디언 두 명이 콤비를 이루어 만담을 주고받으며 청중의 웃음을 이끌어내는 희극 장르인데, 역사적인 기원은 헤이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대중적인 예능 형식으로 틀이 잡힌 것은 대략 100여 년 전. 지금도 현대 일본 대중문화 중에서도 ‘오와라이(お笑い, 일본의 코미디언 혹은 희극)’의 대표적인 장르로 사랑받고 있다. 전용 극장에서는 열리는 만자이 공연이 꾸준히 인기를 끌고, 공중파 TV에서도 만자이 프로그램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만자이로 실력을 키운 코미디언들이 대중적으로도 유명해진다. 영화감독으로 잘 알려진 기타노 다케시(北野武)도 원래 만자이로 데뷔한 코미디언이었다. 한국에는 재치와 순발력으로 박장대소를 이끌어내는 개그가 있다면, 일본에는 치밀한 기획과 현란한 말솜씨로 재치를 뽐내는 만자이가 있다.
◇ ‘보케’와 츳코미’, 일본 특유의 유머 코드
볼거리라는 측면에서 말하자면, 만자이는 소박하다 못해 초라하다고 해야 할 정도다. 두 명의 코미디언이 마이크 앞에 선 채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을 뿐이다. 하지만 일본어를 이해하고 그들의 유머 코드를 알게 되면, 그처럼 발칙하고 현란한 말의 향연이 또 없다. 정치적인 이슈나 사회 문제는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직장 생활이나 인간 관계, 지방색, 패션이나 세태 등 일상 속의 우스꽝스러운 모순을 통쾌하게 까발리고 거침없이 풍자한다. 만자이 콤비에게는 각각 맡은 역할이 있다. 한 명은 멍청한 말, 엉뚱한 말로 웃음 포인트를 만드는 ‘보케(ボケ, 멍청이 혹은 치매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의 역할을 수행한다. 한국의 개그라면 이 지점에서 최대한의 웃음을 이끌어 내는 것이 목표일 것이다. 그런데, 만자이는 그보다 조금 더 복잡해서, 보케에 대한 ‘츳코미(ツッコミ, 찌르기, 파고들기 등을 뜻한다.)’의 신랄한 맞받아침이 있어야 만담 하나가 완결된다. 만자이에서는 보케와 츳코미의 ‘티키타카’가 절묘하게 상승 작용을 일으키면서 서서히 커지는 회오리처럼 웃음을 키워 나간다.
일본 특유의 유머 코드는 바로 이 츳코미 속에 숨어 있다. 일본 대중문화를 잘 안다는 한국의 평론가들이 츳코미에 대해서 ‘갈구는’ 캐릭터의 코미디언, 혹은 상대방의 신체를 손이나 소도구(예를 들어, 뿅망치)로 가볍게 때리는 퍼포먼스라고 설명하는 것을 보았다.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츳코미의 본질적인 역할은 한편으로는 청중들에게 웃음의 포인트를 분명하게 알려주는 데에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얼빠진 농담의 사회적 맥락을 분명히 짚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보케가 “술을 마시니 머리가 팽팽 돈다. 머리가 좋아지기 위해 술을 많이 마셔야겠다”고 멍청한 농을 던지면, 츳코미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なんでやねん)”, “바보 같은 소리는 그만해(もうええわ)” 등의 말로 청중에게 웃음의 순간이 왔음을 분명히 전달한다. 혹은, 보케가 “집 앞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귀여워서, 살 것이 없어도 매일 들러야겠다”고 말했다고 하자.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위한 설정이겠지만, 편의점 손님에게 불쾌한 일을 당한 적이 있는 아르바이트생의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도 있는 이야기다. 그 순간 츳코미가 “그런 것은 스토커 짓이다!” 혹은 “그러다가 너 감옥 간다!”라고 일침을 가한다. 청중의 마음을 대신 표현해주는 의미도 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스토킹이나 성희롱을 옹호할 뜻이 없다는 맥락도 분명히 할 수 있다. 츳코미의 예리한 추임새는 때때로 ‘정치적 올바름’에서 벗어나기 쉬운 보케의 발언이 불필요한 오해로 번지지 않도록 보호한다. 보케는 마구잡이로 웃음을 만들어내고, 츳코미는 열심히 농담을 수습하는, 치밀한 콤비 퍼포먼스다.
콤비로 움직이는 웃음의 코드를 이해하면, 사회생활 속에 배어 나오는 일본인의 유머 감각도 입체적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늘 허튼소리를 늘어놓는 보케 캐릭터가 있는가 하면, 인간관계의 긴장을 솜씨 좋게 풀어가는 츳코미 캐릭터도 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빵빵 터지는’, ‘배를 잡고 웃게 만드는’ 성대한 웃음과는 스타일이 다르지만, 보케와 츳코미의 유머 코드를 적절히 연출하면서 일상 속 긴장을 해소해 나가는 이색적인 웃음의 문화가 있다.
◇ 유머가 사라진 한국 사회
15년 넘게 떠나 있다가 돌아와 보니, 한국 사회에서 유머가 사라졌다고 느낀다. 한국도 원래 대단히 유머 감각을 중시하는 사회는 아니다. 일본 같은 엄숙주의는 아니지만, 연령이나 사회적 지위를 중시하는 권위주의가 팽배하다. “농담은 장소를 가려서 하라”는 점잖은 격언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사회인 것이다. 그래도 예전에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유머의 덕을 꽤 보았다. 사소한 실수는 실없는 위트로 슬쩍 넘어가기도 하고, 뼈가 있는 농담으로 못된 상사를 에둘러 비판하기도 했다. TV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정치 풍자를 보며 권력이나 사회적 모순에 대한 분노도 해소했다.
그런데 지금은 원 없이 유머 감각을 뽐낼 만한 상황도, 속 시원하게 웃을 만한 상황도 퍽 줄었다. 악의 없는 농담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하고, 어영부영 유머 감각을 부리다가 전문성이 없다고 손가락질받을까 겁도 난다. 사소한 일에도 정색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서, 거리에서 타인과 스치는 것도 두렵다. 나만 해도 상대의 말에 불쾌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아졌다. 정치인 등 사회지도층 인사의 과장되고 거친 발언 때문에 부아도 치민다. 심지어는 정통 코미디를 표방하는 TV 프로그램조차 공중파에서 자취를 감추었지 않은가? 나의 편협하고 불친절한 마음부터 반성해야지 싶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오로지 나의 미성숙함 때문일까 라는 의문도 솟는다. 나날이 오르는 물가에 살림살이는 팍팍하다. 사회적 격차가 커지면서 박탈감도 커진다. 양분된 정치 담론은 오로지 거짓과 혐오로 치닫는다. 흉악 범죄 때문에 타인에 대한 불신은 커진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여유가 사라지고 서로를 경계하고 반목하는 분위기가 생기고 있는 것도 사실 아닌가?
낭만주의 시대를 살았던 독일의 소설가 장 폴 리히터(1763-1825)는 유머는 “숭고한 것의 반대(the inverse sublime)”라고 말한다.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유머의 본질은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여유, 권위에 도전하는 대담함에 있다. 그런 면에서, 만자이는 근엄한 집단주의적인 문화에 반기를 드는, 일본 사회 나름의 실천 방법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 한국 사회가 유머를 실천할 여유와 대담함을 잃어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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