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환상과 기대가 없다면

입력
2023.08.30 22:00
27면
인천공항 출국장에서. 모아람 작가 제공

인천공항 출국장에서. 모아람 작가 제공

몇 년 전 개인 블로그에 '디지털 노마드는 여행가가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당시엔 디지털 노마드에 대해 ‘일에 큰 비중을 두지 않고 자유롭게 여행하며 사는 사람’으로 환상을 갖는 분이 많았다. 그래서 “여행가와 디지털 노마드는 시간 배분의 우선순위가 다르기 때문에 동일선상에 놓고 보면 안 된다”라는 내용을 글에 담았다. 그런데 최근 그 글이 자꾸 떠오른다.

사실 ‘유목민’이라는 단어 그대로, 여기저기 이동하며 사는 것이 내 삶이었다. 그런데도 ‘여행과는 다르고 출장에 가깝다’는 둥 경험자의 솔직한 이야기인 양 적었던 그때가 조금 부끄러워진다. 누구보다 환상을 갖고 디지털 노마드를 시작한 장본인이면서, 1~2년 경험해 봤다고 ‘현실이 왜곡됐다’고 글을 썼다니.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아니면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는 말이 더 맞으려나.

그래서인지 요즘 부쩍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과 상황을 돌아보게 된다. 어디로 흘러갈지 알지 못한 채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길에 오른 게 5년 전. 디지털 노마드라는 존재에 대해 인지한 건 6년 전. 그것보다 조금 더 먼저 해외에서의 삶을 마음에 품게 해준 스페인 첫 여행이 벌써 7년 전 일이다.

여정을 떠나기 전 초등학생 등하교 알림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 회사의 CS팀에서 일할 때였다. 서비스 해지 문의를 받으면 고객 이탈을 막기 위해 사유를 꼭 확인해야 했는데 “아이가 외국에 가게 되어서요”라는 내용은 누구도 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 설득할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가 ‘유학 및 이민으로 인한 해지’라고 적으며 통화를 마무리할 때면 나도 모르게 기운이 빠졌다. 그 상황을 반복할수록 ‘저 말을 하는 사람이 내가 되기를’ 더 강력하게 꿈꿨다.

방콕 수완나품 공항 출국장에서. 모아람 작가 제공

방콕 수완나품 공항 출국장에서. 모아람 작가 제공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삶을 선택할 수 있었던 건 엄청나게 용기가 있어서도, 언제고 다시 돌아오라며 자리를 비워두는 회사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디지털 노마드가 되었을 때의 내 상황을 알 수는 없었지만, 불투명에서 비롯된 불안보다 막연한 공상과 희망이 훨씬 크게 마음에 자리하고 있어 기꺼이 시도할 수 있었다. 문자 그대로 ‘잘 모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실적으로는 최대한 많은 정보를 모아서 위험 요소를 줄이기 위한 대비책을 세워두는 것이 나은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의문이 든다. 시작할 수 있을 정도란 대체 얼만큼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 걸까. 오히려 많이 알게 될수록 망설이게 되지는 않을까. 그리고 아무리 확실한 자료에 의한 확신이라 한들, 미래에 대한 결정에는 어느정도 낙관론이 담겨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나 역시도 준비하는 과정에서 최대한 현실적인 사례를 찾으려 애썼고 들뜬 마음에 평정심을 잃지 않도록, 상상력을 최소한으로 제한했다. 몇 안 되는 실제 경험자들이 쓴 글을 읽으며 그들의 고충과 고민을 엿보았지만, 결국에는 그 괴로움마저 부러울 뿐이었다.

우리에게 환상과 기대가 없다면, 과연 무엇을 시도할 수 있을까. 미지의 영역이 주는 불확실성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그만큼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라면, 보다 적극적으로 불안함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것 아닐까.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에서 근심 걱정보다는 설렘과 희망을 꿈꾸기를 소망해 본다.


모아람 디지털 크리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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