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변화 반영이냐, 국가 정체성 부정이냐"… 연일 소환되는 정율성 역사 공원 사업

입력
2023.08.30 14:43
수정
2023.08.30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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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녹지법상 역사 공원 조성 때
시대에 따른 그 의미 변화도 고려
광주시 "한중 우호 분위기 지속
정율성 생가 복원 관광 자원화"
보훈단체 "공원 사업 취소" 촉구


30일 오후 광주광역시청 앞에서 보훈단체 회원들이 광주시의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사업' 전면 철회를 촉구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30일 오후 광주광역시청 앞에서 보훈단체 회원들이 광주시의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사업' 전면 철회를 촉구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율성(1914~1976).'

그의 이름이 연일 소환되고 있다. 그간 대중 사이에 "광주광역시 출신 중국 혁명음악가", "조선인과 중국인의 삶을 살아야 했던 경계인"정도로만 알려졌던 그가 해묵은 이념 논쟁의 도마에 오르면서다. 그를 싸움판 소재로 불러낸 건 여드레 전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다. 박 장관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정율성은 공산당 나팔수"라며 광주시가 추진 중인 정율성 역사 공원 조성 사업 철회를 요구했다.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정율성이 6·25 전쟁 당시 전선 위문 활동을 한 행적을 문제 삼은 것이다. 박 장관은 그러면서 "직을 걸고 (정율성 역사 공원 조성 사업을) 막겠다", "국민의 혈세는 단 한 푼도 반국가적 인물에게 쓰여선 안 된다"고 했다. 수장이 올린 온라인 격문에 보훈부는 사업 저지를 위한 법적 검토에 들어갔다. 그 근저엔 정율성 역사 공원 조성 사업이 '반국가적 사업'이란 정서가 깔려 있다. 12개 호국·보훈 단체 회원 1,200여 명(경찰 추산)이 30일 광주시청 앞에서 집회를 열어 "국가 정체성을 부정하는 짓"이라며 광주시의 사업 철회를 촉구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그렇다면 정율성 역사 공원 조성 사업은 반국가 사업일까.

광주시가 2020년 5월 정율성 역사 공원 조성 사업을 추진한 근거는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공원녹지법)이다. 공원녹지법은 역사 공원을 '도시의 역사적 장소나 시설물, 유적·유물 등을 활용해 도시민의 휴식·교육을 목적으로 설치하는 공원'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른 역사 공원 설치 기준은 국토교통부 훈령(도시공원·녹지의 유형별 세부 기준 등에 관한 지침)에 담겨 있다. 이 지침엔 도시의 역사적 장소나 시설물 등의 보전을 목적으로 하는 역사 공원을 조성할 때 해당 유적 등 문화유산의 자체는 변하지 않더라도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그 의미가 변할 수 있음을 고려하도록 돼 있다. 광주시가 "정율성 역사 공원 조성 사업엔 시대 변화 흐름이 반영됐다"고 주장하는 것도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당시 한중 우호 분위기가 지속되면서 정율성 브랜드를 활용한 관광 자원 개발과 함께 시민 휴식·교육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정율성 생가 정비 사업을 추진했다는 얘기다.

28일 오전 광주광역시 동구 불로동 정율성 생가에서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28일 오전 광주광역시 동구 불로동 정율성 생가에서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광주시 관계자는 "이 사업은 정부·여당, 보훈 단체 등이 주장하는 것처럼 '공산주의자 정율성'을 기념하자는 게 아니라, 중국에서 추앙받는 광주 출신 음악가로서의 가치관을 부각해 관광객을 유치하는 등 지역 경제 활성화를 도모하자는 차원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박 장관이 29일 SNS에서 "그렇게 당당했으면 그의 남침 경력을 왜 숨겼냐"고 광주시를 비판한 것도 사실과 다르다. 광주시는 정율성 역사 공원 조성 사업 기본 계획 수립 당시 정율성에 대한 인물 조사를 통해 그가 1950년 9월 중국으로 갔다가 같은 해 12월 중국 인민지원군 일원으로 귀국한 뒤 전선 위문 활동을 한 행적을 공개했다.

광주시가 정율성 역사 공원 조성 사업을 끝까지 수행하겠다고 한 것도 이런 법적 다툼에 대한 자신감도 일부 반영됐다. 실제 일각에선 보훈부가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는 지방자치법을 통한 법적 조치(시정 명령)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지방자치법 제188조는 지방자치단체장의 명령이나 처분이 법령에 어긋나거나, 현저히 부당해 공익을 해친다고 인정될 때 주무부장관이 서면으로 시정할 것을 명할 수 있다고 돼 있다.

하지만 정율성 역사 공원 조성 사업이 법령을 어겼다는 근거가 명확하지 않은 데다, 공익을 침해했는지도 해석에 따라 판단을 달리할 수 있어 법적 공방이 불가피해 보인다.

광주시 관계자는 "보훈 단체들의 정율성 역사 공원 조성 사업 철회 주장과 요구는 사업의 본래 취지와 실제 사업 내용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하며 심심한 유감을 표한다"며 "광주가 소모적인 이념 공세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보훈 단체의 현명한 판단을 부탁한다"고 말했다.

안경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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