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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은 기어코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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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사를 쓴 정미조 노래 ‘귀로(2016)’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먼 길을 돌아 처음으로.” 우리들 삶의 마지막 자리는 삶이 시작된 그 처음의 자리다. 정미조가 떠났던 음악의 자리로 운명처럼 돌아오는 ‘회귀 서사’에 삶과 죽음의 메타포를 함께 담았다. 그래서 ‘귀로’는 ‘돌아오는 길’이자 ‘돌아가는 길’이다.
역시 내가 가사를 쓴 최백호의 노래 ‘목련(2012)’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랑, 떨어지려 오르는 운명.” 목련은 하늘을 향해 직립하듯 꽃이 핀다. 더없이 도도하다. 내 삶이 저토록 확신에 차고, 순결한 열정으로 가득한 시절이 있었던가. 목련을 보면 늘 드는 생각이다. 하지만 목련의 화려한 생은 찰나처럼 짧고, 지고 나면 모든 열정을 소진한 듯 금세 바닥에서 흙빛으로 바랜다. 비극적 마지막을 예감하면서도 목련은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다. 그 운명적 몸짓을 가사에 담았다.
소설가 박경리의 유고 시집 제목은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다. 삶의 미련을 거둔 이 초연하고도 단단한 문장은, 목련처럼 삶의 열정을 온전하게 소진한 사람만이 주인이 될 수 있다. 내 삶의 마지막이 저 문장의 반이라도 닮을 수 있길 바란다.
우리 모두는 시간의 여행자들이다. 모든 시작엔 반드시 끝이 있다. 마음을 부풀게 하는 새벽의 공기는 금세 한낮의 열기에 밀려나고, 낮은 다시 피로한 저녁과 어두운 밤에 차례로 자리를 내준다. 쳇바퀴처럼 그 하루가 반복되다 어느 날 삶은 멈춘다. 가도 가도 해가 중천에 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어김없이 내 인생의 해는 저물고 있다. 100세 시대는 결코 축복이 아니다. 그만큼 길고 지루한 여생이 앞에 남았다는 뜻이다.
마지막에 관한 다소 감상적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내가 쓰는 글도 오늘이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2020년 봄에 첫 칼럼을 썼으니, 3년 반이라는 꽤 긴 시간이 흘렀다. 이제야 밝히자면, 나는 한때 한국일보 기자였다. 신문을 떠난 지 18년 만에 친정의 지면으로 돌아와 글 쓰는 기쁨이 컸다. 그 시간도 오늘로 일단락된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한국일보를 사랑한다. 내가 몸담았던 신문이라 그런 것만은 아니다. 작가 고종석의 말대로 “(한국일보가) 한국 사회에서 어떤 사회 정치 세력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물리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자유로운 매우 드문 신문”이기 때문이다. 공론장이 양극화되고, 차분한 정론보다 선동이 앞서고, 정치적 진영끼리 극도의 적대감에 휩싸여 있는 지금, 한국일보의 중도 지향 정신은 더없이 소중하다.
대학시절 수업 시간에 어느 교수가 “대학의 주인은 누구냐?”고 우리에게 물었다. 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대학의 주인은 총장도 교수도 학생도 교직원도 아니다. 자유와 고독이라는 이념이 주인이다.”
신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신문의 주인은 사주도 기자도 독자도 아닌, 어떤 이념이다. 공동체적 선에 기여하는 그 이념은 한국일보가 2019년 공개한 편집강령 개정본에 잘 드러나 있다. “우리는 정부보다는 국민, 힘 있는 자보다는 힘없는 자, 부패와 비굴보다는 청렴과 양심, 거짓보다는 진실, 사익보다는 공공이익의 편에서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며 이를 위해 막중한 책임의식을 배가할 것이다.” 지적 자유의 품이 넓은 한국일보의 건투를 빈다. 그동안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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