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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과 살인

입력
2023.08.28 16: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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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연일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린 3일 오후 대구 수성구 달구벌대로에서 자전거를 타던 시민이 뙤약볕 아래서 물을 마시고 있다. 뉴스1

연일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린 3일 오후 대구 수성구 달구벌대로에서 자전거를 타던 시민이 뙤약볕 아래서 물을 마시고 있다. 뉴스1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주인공은 햇빛 때문에 살인한다. “나는 햇볕의 그 뜨거움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앞으로 움직였다. (중략) 하늘 전체가 활짝 열려서 불을 비 오듯 쏘아 놓는 것만 같았다. 내 온몸이 긴장했고, 손으로 권총을 힘 있게 쥐었다.” 햇볕과 더위 속에서 순간 엄습하는 ‘착란 증상’을 고려하면, 이해 못 할 장면은 아니다.

□ 고 신영복 선생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더위의 잔인함을 전했다. 여름 징역은 옆 사람을 단지 ‘삼십칠도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하며, 존재 그 자체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하고, 자신도 미움 받는다는 사실의 절망을 이야기한다.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 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인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이다.

□ 미국 스탠퍼드대와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연구 결과, 기온이 평년보다 1도만 상승해도 소요 발생 빈도가 15% 가까이 높아졌다. 뉴욕타임스는 기온이 1도 상승할 때마다 정신병, 치매 또는 약물 사용 환자의 사망 위험이 거의 5% 증가한다는 연구를 전했다. 살인을 포함한 대인 폭력도 4~6% 증가한다. 영국 임페리얼칼리지런던대학 연구팀도 “월평균 기온이 1도 상승하면, 자살 발생이 1.5%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 폭염이 기승을 부린 올해 여름, 한국에선 유난히 참혹한 강력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이런 사건들이 날씨 탓이라고 하면 우습게 들리겠으나, 무시할 것만도 아니다. 기후위기가 촉발하는 불안·공포·슬픔·수치심·죄책감 등을 설명하기 위해 ‘기후 고통(climate distress)’이란 용어도 등장했다. 인간의 신체와 정신은 어쩔 수 없이 ‘날씨’에 복종하며, 기후위기에 따른 폭염은 에어컨이나 나무 그늘이 없는 모든 공간을 지옥으로 만든다. 기후위기와 사회불안의 상관관계를 들여다볼수록, 폭염의 잔혹함이 사회 곳곳에 방치되고 관심·관리받지 못한 우리 안의 괴물들을 자극하는 측면을 생각하게 된다.

이진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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