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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분야 생존 법칙: 궁예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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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저 안 잘리고 살아 있으면 다음에 또 보겠죠. 하하."
지난달 공공분야에서 근무하는 A씨와의 저녁 자리에서 "다음에 언제 보죠?"란 말을 건넨 순간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의미심장한 말에 "무슨 일이 있냐"고 묻자 "요즘 공공 쪽 분위기가 그렇다. 그냥 농담한 것"이라며 겸연쩍게 웃었다. 이런 반응을 보인 건 A씨만이 아니다. 요즘 공공분야에서 일하는 분들을 만나면 이 같은 자조 섞인 뼈 있는 농담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공공분야 종사자로 쓴 건 혹시 이분이 표적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민간기관보다 보수는 적어도 사회를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 그래도 안정적인 평생직장을 다닌다는 점 때문에 공공분야를 택한 사람들. 그런데 올해 여름부터 '언제 일에서 손을 떼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이들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인기 예능 프로그램 '라디오스타'의 방송 마무리 멘트인 "다음 주에 만나요 제발~"을 이들과 만날 때 작별 인사로 읊어야 하는 건 아닌지 요즘 말로 '웃픈(웃기고도 슬픈)' 사회가 됐다.
물론 요즘 관가의 세태에 대한 그저 그런 농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말속에 '세상이 바뀌었다'는 불안감이 있어 그저 웃을 수만은 없다. 이들이 파리 목숨 신세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한 건 최근 벌어진 일들 때문이다. 앞서 6월 대입 수능 킬러 문항 논란에 교육부 담당 국장이 대기발령됐고, 보건의료 정책 분야의 2인자인 보건복지부의 담당 실장이 간호법 사태로 하루아침에 자리를 비워야 했다. 사회적 논란에 따른 담당 실·국장의 연이은 대기발령에 대해 관가에선 '그동안 보지 못한 초식'으로 매우 이례적이란 평가가 나왔다.
특정 이슈로 국민적 공분이 일어나면 정부는 책임자를 경질하곤 한다. 그 대상은 주로 장·차관급 혹은 대통령실 고위 참모였다. 정치적 책임을 지면서 국민에게 쇄신 의지를 보여주려는 의미다. (그렇다고 교육부·복지부 장·차관이 경질됐어야 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위법을 저지른 경우가 아니라면, 윗선의 지침에 따라 일을 해야 하는 공직의 특성상 실무진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그간의 룰이 깨지면서 공포감은 곳곳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대기발령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괘씸죄'도 물었다는 게 관가의 시각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메시지가 나간 뒤 떠들썩해질 걸 예상해 대처하지 못한 점, 국민에게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못해 윗선을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고려됐다는 것이다.
이렇다면 이제 공공분야 종사자들의 최우선 과제는 '윗선 심기 경호'다. 자신이 짠 정책 메시지로 윗선이 불편해하진 않을까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고, 정책 초점은 국민이 아닌 용산에 맞춰지게 된다. 궁예의 '관심법'처럼 용산의 생각을 꿰뚫어야 자신의 자리를 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용산의 생각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돌아오는 건 철퇴뿐. 실·국장은 용산 심기를 살피고, 과장과 사무관, 주무관은 그런 실·국장의 눈치를 봐야 하고, 공공기관은 시종일관 이들과 용산에 귀를 대야 한다. 윗선을 살피며 용산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행보를 바랐다면 윤 대통령의 공직기강 잡기는 성공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대가로 공공분야의 몸 사리기가 확산되고, 복잡한 사회 문제의 해결을 위해 나서는 이는 점점 사라질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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