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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 권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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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작가 주호민씨는 아이의 불안 증세가 계속되자 그 원인을 알기 위해 가방에 녹음기를 넣어 보냈다고 했다. ‘딱 하루’치 녹음에서 학대 의심 정황을 발견한 주씨는 아이의 특수교사를 고소했다. 이후 교사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몰래 녹음’이 교권 침해라는 비난이 일자 그는 정상적 소통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구구절절한 그의 입장문을 읽으며 ‘그랬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장애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두터운 편견, 낙후된 특수교육 시스템 속에서 장애아를 둔 학부모는 늘 약자였으니까. 막막한 상황에서 녹음기는 주씨 부부가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 아니었을까.
두 번째 녹음은 달랐다. 주씨는 아이 가방에서 녹음기를 발견한 담임교사와 활동지원사에게 곧바로 사죄했지만, 앞서 비슷한 과정을 거쳐 교사가 직위해제를 당한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이들에게 가방 속에서 작동 중이던 녹음기는 그 자체로 잊기 힘든 악몽이었을 것이다. 아이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또 한번의 녹음을 충동질하고, 그 충동을 이기지 못하면서 녹음기는 ‘갑질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녹음은 갑질의 도구보단 ‘약자의 무기’로 쓰여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좀 더 공평해지는 느낌이 든다. 온갖 괴롭힘과 부당한 대우에 시달리는 이들이 피해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명백한 증거가 녹음이다. 가해자가 직장 내 지위와 영향력을 이용해 피해자를 옥죄는 무도한 사회, ‘맞은 놈’ 대신 ‘때린 놈’이 두 발 뻗고 자는 이상한 사회에서 녹음기는 약자들의 유일한 자기 방어 수단이자 희망이다. 다만, 피해자가 직접 녹음하는 모험을 감수해야 하고 잡음 발생을 꺼리는 조직 문화 속에서 증거가 있어도 시시비비를 가리기 쉽지 않은 현실이 그 실행을 가로막곤 한다.
오래 알고 지낸 후배가 1년여 전 새로 샀다며 사원증처럼 생긴 녹음기를 보여줬다. 직장에서 수년간 괴롭힘을 당해 왔는데, 관련 기관 상담 과정에서 녹음을 권유받았다는 거다. 증거 수집을 직접 해야 한다는 사실이 뜨악했지만 지긋지긋한 괴롭힘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 구입했다고 했다. 하지만 끝내 녹음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녹음을 위해 가해자의 폭언 상황과 정면으로 맞닥뜨릴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녹음 시도가 발각될 경우 뒤따를 보복도 두려웠다. 후배는 결국 녹음기를 목에 건 채 바들바들 떨며 가해자를 피해 다닐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애처롭기 그지없는 약자의 무기가 녹음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녹음기로 무장하는 약자들이 늘고 있다. 국세청은 이달 초 전국 세무서 민원봉사실 직원들에게 신분증 형태의 녹음기를 지급했다. 악성 민원인을 응대하던 직원이 쓰러진 뒤 직원 보호 차원에서 이뤄진 조치다. 보건복지부도 최근 폭언과 성희롱에 시달리는 요양보호사를 보호하기 위해 녹음기를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녹음기 지급은 구청과 주민센터, 학교 등으로 확산 중이고, 영상까지 기록되는 ‘보디캠’ 지급도 늘고 있다. 바야흐로 녹음을 권하는 사회다. 일상이 더욱 촘촘히 기록될수록 부당한 대우와 갑질이 위축될 테니 다행스럽다. 다만, 약자의 녹음기가 는다는 건 그들이 대항해야 할 뻔뻔하고 버거운 상대들도 많아지고 있다는 의미라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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